역사 - 그 뒤안길

악성 성범죄 사건, 흥분했다 곧 망각

뚜르(Tours) 2012. 8. 17. 08:30

악성 성범죄 사건, 흥분했다 곧 망각… 음란물 널린 세상 '집단 성도착' 낳아
범인 인권 옹호로 흉악범 잘 지내… 엄한 법집행만이 바로잡을 수 있어

문갑식 선임기자

2009년 9월 경찰에 붙잡힌 차모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피해자를 제외하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름 대신 '경기북부 발바리'로 불렸다. 애견가들이 언론을 향해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느냐"고 화를 냈을 만큼 그는 희대의 성폭행범이었다.

당시 39세였던 차씨는 1t 트럭을 몰며 파주·의정부·고양시 일대에서 배송(配送) 일을 했다. 2002년 결혼해 아내와 딸을 두었고 조카까지 맡아 키우던 그는 가정에서는 성실한 남편, 동네에서는 지극한 효자(孝子)로 통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야수(野獸)로 돌변한 것은 2001년 1월 의정부 주택가 담을 넘으면서부터였다. 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피해자의 신고를 막으려고 성폭행을 하면서 그는 '강간 중독(中毒)'에 빠졌다. 그 뒤부터는 돈이 아닌 성폭행이 담을 넘는 주목적이 됐다.

발바리 아닌 늑대로 돌변한 그는 친자매를 동시에 성폭행했고 마음에 드는 여성은 몇 달 뒤 다시 찾아가 성폭행하기도 했다. 불륜 남녀를 덮쳐 남성의 손발을 꽁꽁 묶고 그 앞에서 여성을 유린한 뒤에 "앞으로 나쁜 짓 하지 말고 살라"고 훈계까지 했다. 그런 그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이 내용은 거의 모든 언론 매체에서 단신(短信)으로 처리되거나 무시됐다. 9년간 125명의 여성과 그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성폭행 최다기록 보유자의 범행은 이렇게 세상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성범죄 사건 파일들을 들추다 보면 일정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처럼 빨리 흥분했다가 빨리 망각해버리는 민족도 드물다는 것이다. 아마 이 분야의 올림픽이 있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1등일 것이다.

지난달 국민 모두를 아프게 한 경남 통영 한아름양 사건도 어느덧 런던올림픽 열풍에 밀려 옛일이 됐다. 2008년 12월 교회 화장실에서 나영이를 짓밟은 조두순이나 2010년 6월 초등학교 1학년생을 집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김수철 사건도 비슷하게 잊혔다.

우리는 성범죄 사건에 냄비처럼 반응하는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나라 전체가 성도착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라는 가설과 만나게 된다. TV 화면에서 벗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이 비난은커녕 화제가 된다. 이렇게 쉽게 매명(賣名)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컴퓨터만 켜면 고담준론(高談峻論) 곁에 벌거벗은 남녀가 뱀처럼 뒤엉킨 사진과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고픈 분들께…'라는 자극이 범람한다. 지하철에서 10명 중 8명이 들여다보고 있는 휴대폰 화면도 손만 대면 '그녀의 짜릿한 뒤태…'로 이동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을 바로잡을 방법은 엄한 판결과 법집행뿐이다. 그런데 '인권판사'들로 가득 찬 법원은 성범죄에 관대하다. 여성 목숨을 파리 잡듯 한 유영철을 비롯한 사형수들은 선고를 비웃듯 지금도 감옥 안에서 잘 지내고 있다. 지난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서 뽀얗게 먼지가 덮여 있을 이들의 사형집행서에 서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하는 일마다 미움받는 대통령의 면모가 일신됐을 텐데 하고 상상해봤지만 이내 접기로 했다. 아마 대통령은 흉악범 처단 뒤에 따를 '범죄자의 인권'이라는 논전(論戰)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들이야 어찌 됐건 '사형 폐지국'이란 허울도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하긴 그런 용기가 있었다면 나라가 5년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 대통령뿐이랴. 유력 대권 후보에게 '그년'이라고 욕한 뒤 말을 뒤집는 정치인, 성추행 사실을 감추다 거꾸로 억지를 쓰는 정당도 있지 않은가. 이러니 이 땅의 어머니와 딸들이 바라는 '성범죄로부터의 광복(光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