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사추기의 남자들이여!

뚜르(Tours) 2012. 11. 6. 15:12

# 정말이지 절기는 속일 수 없나 보다.
그 찌던 여름이 언제 가나 싶더니 벌써 입추가 지난 지도 열흘이나 돼선지 햇살과 바람에 가을냄새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속일 수 없는 절기와 감출 수 없는 계절이 있듯이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그런데 인생의 봄을 맞을 즈음 누구나 예외없이 ‘사춘기(思春期)’를 거치듯, 인생의 가을을 맞을 즈음엔 ‘사추기(思秋期)’를 겪기 마련이다.

 # 사추기는 마음의 갱년기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자신이 필요치 않은 존재라고 느끼게 되는 그런 시기다.
후배들은 밑에서 치받으며 커 오는데 자신은 여전히 답보이다 못해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때다.
정작 몸은 늙은 게 아닌데 마음은 시들해져 점점 더 주눅 들고 스스로 가라앉는 시기다.
게다가 간이 졸아들어서인지 세상에 만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어 보여 뭣 하나 결단도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낸다.
아내와 아이들 보기도 민망하고 동창이라도 만나면 머쓱하기만 하다.
등산한다, 자전거 탄다 하며 몸은 그런대로 챙겨 생물학적으로 살 날은 여전히 구만 리 같은데
정작 사회적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면 당장 내일이 안 보인다.
그래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놀아도 논 것 같지 않다.
그저 점점 느는 것은 새치와 사소한 일에도 분 내는 신경질뿐이다.
이래저래 인생 잘못 산 것 같아 괜히 화만 치민다.


 # 사춘기의 특징이 ‘반항’이라면 사추기의 그것은 ‘우울’이다.
여성들의 경우엔 ‘폐경기’를 전후해서 우울증이 동반되는 경향이 적잖다지만
남자들의 경우엔 사회적 활동이 축소되거나 정지되면서 급격히 우울해지기 쉽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올라갈 일은 없어 보이고 내리막만 있는 것 같으니 의욕도 안 나고 살맛도 없어지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사소한 일에도 서운해지고 작은 일에도 삐치기 일쑤인 좀팽이가 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줄어 여성화, 중성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소리없이 스며드는 자기 인생에 대한 허무감과 좌절감 때문이리라.


 # 사춘기는 일종의 ‘성장통(成長痛)’이다.
자라려면 아픈 것이다.
하지만 사추기는 일종의 ‘정지통(停止痛)’이다.
멈추는 게 쉽지 않은 게다.
아니 정지하고 멈추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후퇴하고 퇴보하며
시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주눅 들고 좌절하고 끝내는 스스로를 닫아버리며 무너져 내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실 누가 늙는 것을 바라겠는가.
누가 점점 남성성을 상실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원하겠는가.
게다가 더 이상 주목받을 수 없고, 더 이상 자신의 인생무대 위엔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과 자포자기의 감정이 뒤섞인 가운데 퇴장명령이나 진배없는 변화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기가 쉽겠는가.


 # 사춘기 시절, 가출의 경험이 있는 이들이 꽤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가출은 잠시의 방랑일 뿐이지만 사추기의 가출은 시들해진 삶 자체로부터의 탈출의 몸부림이다.
사추기엔 어딜 가나 송곳자리처럼 불편하고 맘 붙일 곳이 없다.
직장에서 떨궈진 존재는 가족한테도 외면받기 일쑤다.
아내도 자식도 아비 속이 어떤지는 관심도 없다.
친구를 만나도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술만 축내다 속만 버릴 뿐이다.
그래서 마침내 탈출하는 만만한 비상구가 산이다.
정말이지 대한민국이 산 많은 나라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속 터져 자살한 사추기 남자들이 숱하게 널렸을 법하다.
하지만 산을 오르내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사추기의 남자들, 특히 가장들에게 그래도 가장 힘이 되어줄 이는 역시 아내와 자식들이다.
불쌍하게 여기고 안아주라.
어깨 처진 아빠에게 한번 힘내라고 안겨보자.
15년 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고 부르던 그 노래를 다시 불러줘야 할 때가 이미 코앞에 닥쳤다.
자, 사추기의 남자들이여! 한번 더 힘을 내자!


              <정진홍의 소프트파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