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철의 삼각지 전적지 안보관광

뚜르(Tours) 2013. 4. 7. 16:45

어제(2013. 3. 23) 60산우회에서 강원도 철원鐵原으로 <철의 삼각지 전적지 안보관광>을 다녀왔습니다.
<철의 삼각지>란 북위 38도 북쪽 중부에 있는 철원, 김화, 평강을 연결하는 군사 요지로, 6ㆍ25 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습니다.
철원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김일성 고지 등입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여러 전투중에서도 백마고지전투가 가장 치열하였습니다.
해발 395m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피아간 1만 7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0만 발이 넘었다고 합니다.

아침 8시 잠실 종합운동장 앞에서 만나 정각에 출발하였습니다.
40명 정원의 버스에 39명이 꽉 들어찼습니다.
평소 산행에는 절반 정도 나왔었는데...
10시 반경 <철의 삼각지 전적지 관광사업소>에 도착하여 수속을 하고는 인근의 <고석정孤石亭>을 둘러봤습니다.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 현무암 협곡 강 가운데에 약 20m 높이로 우뚝 선 화강암 고석바위가 있고 강변에 있는 바위 위에 누각 형식의 정자(고석루)가 있습니다.
특히 고석바위에는 조선 시대 명종 때 임꺽정林巨正이 은신하였다는 자연 석실이 있고, 임꺽정은 건너편에 있는 석성에서 의적 활동을 하였다고 전해옵니다.
한탄강의 빠른 물줄기가 주변의 기암괴석과 어울리며 철원지역 최고의 경관을 만들고 있습니다.
레프팅 코스로도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경관도 뻬어났지만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철원은 추운 곳이라는 생각에 배낭에 옷들을 챙겨넣고 갔었는데 날씨가 참 포근했습니다.
그곳 사람인 유병숙해설사가 <드문 날씨, 복받은 날씨>라고 했습니다.
<임꺽정가든>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하고는 <제2땅굴>을 참관하러 갔습니다.

제2땅굴은 강원도 철원鐵原 북쪽 13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북한이 판 남침용 땅굴로서 북한에서 군사분계선(휴전선)까지 2400m, 군사분계선에서 우리쪽으로 1100m, 총 3500m를 남북대화(7. 4 남북공동성명)를 하면서도 남쪽으로 파 내려왔습니다.
1973년 11월 20일 최전방에서 경계 근무를 하던 초병 2명이 지하의 아주 작은 폭음소리를 듣게 되어 청음활동을 강화하던 중, 땅굴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당시 농업진흥공사가 지하수 개발을 위해 도입한 시추장비를 투입하여 총 45개의 시추공을 뚫어 이중 7개가 적의 남침용 땅굴에 관통되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 땅굴은 북괴의 호전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땅굴 입구에는 발견 당시 땅굴의 내부수색중 적이 설치해 놓은 폭발물에 의해 장렬히 전사한 8명의 병사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반공정신을 더욱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아침에 철원으로 가는 버스속에서 강장신형이 마이크를 달라고 했습니다.
마이크를 잡더니만 깜짝 뉴스를 발표했습니다.
’내가 제2땅굴 탐사를 직접했다’고.
그러면서 당시 농업진흥공사에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전문가로 추천을 받아 참여했다면서, 그때의 상황을 우리들에게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강형은 지금 휴전선 남방한계선내에 있는 <DMZ생수>를 개발 판매하고 있습니다.)

땅굴의 발견경위와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땅굴 :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高浪浦) 북동쪽 8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약 1.2km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2땅굴 : 1975년 3월 24일 강원도 철원(鐵原) 북쪽 13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3땅굴 :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板門店) 남쪽 4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4땅굴 :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楊口) 북동쪽 26km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2땅굴을 둘러보고는 <철원평화전망대>로 갔습니다.
DMZ내의 자연생태, 궁예도성의 성곽, 평강공원,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바로 눈앞에, 코앞에 펼처져 있는 땅이 북한이라는 사실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 북핵문제로 북한의 위협이 드높아서 더욱 그랬던가 봅니다.

월정리역月井里驛 을 찾았습니다.
경원선의 간이역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곳 비무장지대 내 월정리역에는 부서진 채 고철이 되어버린 열차 한 량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건물은 1988년 복원된 것입니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월정리역 앞에 있는 <두루미관>을 둘러봤습니다.
두루미와 독수리, 부엉이, 소쩍새, 백로, 황조롱이, 멧돼지 등 희귀조류와 동물들의 박제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철원평야는 두루미의 최대 월동지이며, 재두루미의 중간기착지 혹은 월동지입니다. 겨울철에는 두루미·재두루미와 쇠기러기 등의 집단이 도래하는 우리나라 최대 도래지입니다.
철원 철새도래지는 철원평야 가운데 있으며, 겨울에는 땅 속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얼지 않기 때문에 철새들이 물과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9월 중순∼10월 중순부터 두루미·재두루미·기러기 등 많은 겨울철새들이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와 겨울을 나고, 일본 등 따뜻한 지방으로 가는 많은 겨울철새들이 쉬어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겨울철에는 독수리와 같은 수리류도 볼 수 있으며, 두루미·재두루미 등 귀한 새들이 와서 겨울을 지내고 일본에서 겨울을 지내는 재두루미와 흑두루미들은 이곳을 거쳐 북쪽으로 갑니다.


 

마지막으로 <백마고지 전적비>를 참관했습니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서 <395고지>라고도 합니다.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유엔군과 북한·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金鐘五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습니다.
중공군은 1만3000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습니다.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됩니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된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우리들을 안내하던 애띈 병사의 구호에 따라 묵념을 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호국 영령들이시여 !
감사합니다.
편히 잠드소서 !


<백마고지전승비> 뒷면에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백마의 얼

- 모윤숙 -


풀섶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 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이 한몸 초개같이 바치려 숨찬 목소리로 다- 같이

강물을 헤치고 산을 부수며 달려오는 적들을 막았노라.

수 많은 적을 따라 소탕하고 조국의 얼로 내달려

떡갈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원수의 고함을 눌러 버렸나니

쓰러지며 죽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숨결을 돌리고

숨지려는 조국을 살리었노라.

나의 조국 영원한 땅이여 만세를 가도록 그 얼은 살았으니

지금도 그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저 몰려오는 적을 막고 있노라.

푸르러 푸르러 영원한 젊음 우리는 그 품에 안겨 안식하리라.

어머니 조국에 이 혼을 맡기며 후회없이 더 강하게

앞으로 앞으로 달려 가리라.

 

/박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