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安住(peaceful living), 그것은 곧 죽음이다

뚜르(Tours) 2014. 4. 14. 23:32

존 포웰의 "가족"이라는 글에 보면 독수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디언 용사가 길을 가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발견하고는
어찌해야 하나 하고 망설이다가 닭 둥지에 그 알을 넣어 주었다.
얼마 후 독수리 새끼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독수리가 본 세상은 마당에 몰려 돌아다니면서 땅을 헤치고 먹이를 찾거나
겨우 몇 미터 정도만 날 수 있는 닭의 세계였다.
독수리는 다른 닭들과 다를 바 없이 자랐다.
죽을 때가 가까워진 독수리는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다
힘찬 날개짓을 하며 하늘을 나는 새를 보게 되었다.
그는 옆에 있던 닭에게
"저게 무슨 새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저건 독수리야.
새 중에서도 가장 당당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새지.
하지만 너는 꿈도 꾸지 말아.
우린 아무리 그렇게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으니까."
이렇게 하여 독수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닭인 줄 알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때로 잘못된 인식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어간다.

뉴질랜드에 사는 키위라는 새는
앞을 못 보고 날지도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키위가 서식하는 지역이 화산지대여서
뱀이나 파충류 따위의 천적이 없는 반면
먹이가 풍부하다 보니
굳이 날아다닐 필요가 없어져
날개와 눈의 기능이 퇴화된 결과라고 한다.
주어진 현실 여건에 안주하다 보면
본래 갖고 있던 능력마저 사라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상징적인 사례인 것이다.

닭은 다른 조류처럼 날개가 있다.
그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곡식과 벌레 등을 먹고 살았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날개의 근육이 약해져 갔다.
굳이 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속담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에도 닭은 지붕 정도는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받아먹는 행동에 더 익숙해지면서 요즘의 닭은 아예 날지 못하게 됐다.
이것이 닭이라는 종의 비극의 본질이다.
동물원에서 사자에게 산 채로 잡아먹힌 닭도
사육사가 던졌을 때 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푸드덕거리기만 했을 뿐 날지 못하고 사자 우리로 떨어졌다.
닭의 날개는 조류로서 닭의 존재의 근거다.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진 닭은 날짐승으로서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것이다.

모든 존재에게는 ‘닭의 날개’와 같은 것이 있다.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
좀 비약해서 말하면 ‘정체성(Identity)’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존재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면 언젠가는 닭과 비슷한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박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