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를 예리하게 분석한 에른스트 르낭은 민족의 핵심이란 모든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공유하는 동시에 많은 것을 ‘잊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고 지적했다. 곧 집단적이고 선택적인 기억이 민족을 유지하는 핵심이라는 말인데, 우리 역사도 이러한 집단적 기억 상실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선택적 기억의 과정은 민족의 역사를 예외적인 것으로, 그리고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이라는 굵직한 사건을 연달아 겪은 우리에게도 분명 그런 정서가 발견된다.
얼마 전까지도 6월 25일이 다가오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적 역사를 경험한 우리 민족’이라는 특집방송 예고문이 들리곤 했다. 최근 경제성장과 남북 대립이 많이 해소되었다고 믿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식의 과다한 표현은 대충 사라진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런 정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할 민족들은 많이 있다. 유대인들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자신들의 비극을 강조하는데 그들의 주장에는 사실 일리가 있다. 저 옛날 바빌론의 유수로부터 시작해서 나치에 의해 600만명이 참살된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던 그들이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나라가 3분(分)되어 지도에서 이름이 사라졌다가 1차 세계대전 후에야 복구된 폴란드도 분명 자신들의 역사야말로 가장 비참한 역사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것이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연 3만 달러를 넘는 경제적 윤택함을 누리고 있지만, 아일랜드인들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민족’이라고 불렀다. 8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고 언어조차 상실했으며, 그 땅에서 태어난 뛰어난 인물들이 영어로 글을 쓰고 영국인으로 인식되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 외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종족들도 예외적 역사를 주장하는 대열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문제는 모든 민족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예외적이라고 믿음으로써 야기되는 현실정치의 충돌이다.
이웃한 민족들이 수백 년, 수천 년 살아오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역사적, 지리적 접촉과 중첩(重疊)이 현재의 이해관계를 위해 악용되는 것이다.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는 우리나, 다민족국가로서의 부담감을 안고 있는 중국과 일본은 모두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거나 위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려사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 과거사를 놓고 벌어지는 일본과의 대립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은 형성되고 변화하고 해체되기도 한다는 사실, 따라서 불변하는 지고(至高)의 선(善)으로서의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민족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던 19세기식의 민족주의 시대도 이제 지나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르낭의 말대로 민족이 얼마나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인가를 당사자들이 인정하게 될 때 그것을 둘러싼 끈질긴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기대된다.
-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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