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호박꽃 / 최두석

뚜르(Tours) 2023. 10. 5. 15:58

 

호박꽃   / 최두석


연애 시절 애인에게
호박꽃이 아름답다고 말했다가
파국을 맞을 뻔한 적이 있다
나중에 아내가 된 그 처녀는
긁힌 자존심에 바르르
몸을 떨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땐 나에겐 진정으로
호박꽃이 아름답게 보였다
눈요기로 화초를 심지 않는
농민의 아들로서 호박나물과
호박떡을 먹고 자란 탓이라고
애써 변명하고 달래었지만
미묘한 정감의 속살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먹고 사는 것도 좋지만
분위기도 좀 살려보자는
핀잔을 주고받으며
어언 이십 년을 함께 산 지금도
간혹 아내는 그때의 상처가 덧나고
여전히 나는 호박꽃이 아름답게 보인다
호박꽃 초롱을 들여다보노라면
흙담 위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이 어른거린다.

- 최두석,『꽃에게 길을 묻는다』(문학과지성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