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선 달력 한 장 /박종영
새해 첫날 달력을 벽에 걸면서도
낯선 숫자가 빤히 쳐다보는 기세에 눌려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어도 넘기지 아니하자
바스락대는 종이 소리가 위협적이다.
날짜를 채워야 의무가 완성되는
달력의 능력으로 흐르는 시간이 불안할 때,
멈춰 선 날짜를 보면서 미안감도 들고
넘기지 않아도 차곡차곡 쌓이는
삶의 층계를 헐어 낼 재간도 없다.
흔히 기억할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고
지난 시간을 되돌려 기억하려는 것은
또 다른 달력을 마음 안에 걸어 놓는 일.
부박한 종이에 박힌 셈본 같은 숫자 앞에서
가난하게 돌아오는 날이 부끄러워
망설임 하다가 작정하고 멈춰 선
한 장 12월의 달력을 넘기는 이별의 시간,
세월의 술래로 춤추는 광대는 과연 누구인가?
세상의 모든 설렘을 모아 젊음을 노래하던
호기 찬 지난날의 오늘에 서서,
달력 속의 아담한 초가집 한 채가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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