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강(滄江公 諱 趙涑)

[스크랩] 창강(滄江)조속(趙涑)의 조작도(鳥鵲圖)

뚜르(Tours) 2006. 3. 4. 22:11

     

조속(趙涑)

조작도(鳥鵲圖)

조작도는 까치가 고목 가지에 앉아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자연의 일경(一景)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주의 원리가 함축적으로 표현된 그림이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
작품분석화조화의 화론감상

  
작품분석

〈조작도〉를 영모화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지만, 화조화의 일반적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보아 화조화라 해도 무방하다. 세로 113.5cm, 가로 58.3 cm의 장축 형태로 된 그림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종이에 수묵을 사용하여 그린 이 그림은 세련된 필법과 적절한 묵법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선비화가 조속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보여 준다. 특히 화면 오른쪽에서 화면 안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나무 등걸의 표현과 뻗어 나온 잔가지들의 필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나뭇잎은 담묵(淡墨)을 사용하여 점을 짧게 반복적으로 찍어 개념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강직한 느낌의 나뭇가지와 어울려 화면에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까치와 참새는 다소 성근 듯이 묘사되어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스산하고 삽상한 아침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호화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고 섬세한 중국이나 일본 화조화에 비하여, 세부 묘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조금은 거친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전체적인 통일성과 생동감을 위해서 세부에 집착하지 않는 한국인의 선천적인 대의성(大義性)을 드러내고 있다.

  
화조화의 화론

눈앞에 보이는 자연 경물(景物)을 필름에 담듯이 그리는 서양화는 모든 것을 그림 틀 속에 한정지우고 있기 때문에, 그 범위를 넘는 세계에 대해서는 상상해 볼 여지가 없다. 이와 달리 동양화는 화면상의 영역이나 경물 그 자체에 국한하지 않고 오히려 화면 밖의 보이지 않는 넓은 세계를 중요시한다.
〈조작도〉에서 나뭇가지가 화면 밖에서 들어와 잠시 모습을 나타냈다가 다시 화면 밖으로 빠져 나가는 표현은 무한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나무 뿌리가 나타나 있지 않고, 원 둥치가 화면에 생략되어 있다 하더라도 관조 속에서 그 생략을 보충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생략은 결코 화면의 결핍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무 뿌리와 원 둥치의 생략은 화면의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그 존재 형식은 시계(視界) 밖의 자연 전체를 화면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화면의 깊이와 상상의 폭을 넓혀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 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조작도〉 화면에 나타나 있는 나무와 새는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화면 밖의 광대한 대자연을 함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천지 조화의 오묘한 이치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솔개는 하늘 위에 날고 물고기는 물 속에서 뛰논다”
   (鳶飛戾天 魚躍于淵)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시경 詩經》의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나오는 말로, 자연의 섭리와 조화를 새와 물고기에 비유해서 한 말이다. 〈조작도〉의 새는 나무 위에 앉아 있지만 그것은 자연의 조화와 섭리에 따라 광대 무변의 공간을 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새인 것이다. 그림의 새는 앉아 있어서 그 속성이 아직은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새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나 사고 능력으로 광대 무변한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규명한다는 것은 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나 수사학적 논리는 그것을 구사하면 할수록 오히려 대자연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결과를 낳는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사물의 형태에 집착하여 그릴수록 그 본질에서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동양화는 직설보다는 은유(隱喩), 대상의 객관적 존재 형태보다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관념적이고 포괄적인 상징성을 중요시한다.
〈조작도〉에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나무와 새는 존재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대한 가능형 속에 매몰되고 침투되어 있는 상징적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조작도〉는 자연계의 모든 가능형을 존재의 근본 원리로 하고, 그 상징적 표시로서 나무를 그리고 새를 그린 것이다.
동양화론의 입장에서 화가의 화의(畵意)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배면에 깔면서 그 향기가 은은히 배어 있는 그림을 화격(畵格)이 높다고 말한다. 거기에 그림을 그린 화가가 고매한 인격과 높은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림의 격이 한층 더 높게 평가된다.

  
감상

〈조작도〉의 배면에 흐르고 있는 화의에 공감하고 그림의 높은 경지를 음미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감상자 또한 폭넓은 사고와 교양, 그리고 예술적 안목을 필요로 한다. 높은 예술적 안목과 교양을 지닌 감상자라면 〈조작도〉의 나무와 새가 실제의 모습과 같지 않고, 형상이 생략되고 간소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림의 예술미를 대자연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완상(玩賞)하고, 거기에서 자연의 도(道)를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겉으로 드러난 형태에만 집착하는 감상자라면 〈조작도〉는 그림의 심오한 화의에도 불구하고 나무와 새를 그린 그저 평범한 풍경화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동양화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화조화를 감상할 때 화면의 제한된 영역과 화면에 나타난 꽃과 새, 아니면 나무와 새의 형태나 구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천지 자연의 조화와 이치의 상징형으로 보고 느끼는 태도가 중요하다. 조속의 〈조작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한 안목과 감상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출처 : Romio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Romio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