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 위치한 배티성지는 예전에 동네 어귀에 골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 라 는 말이 생겨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가 되었다. 언제부터 이곳으로 교난을 피해 교우들이 몰려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교우들이 은거하였음에는 틀림없고 배티만큼 치명자의 묘소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곳도 드물다. 배티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 중심지였다. 배티 일대 모두가 신부님의 손길이 가득한 지역이었다. 박해시대 교통의 중심지였던 배티는 배티는 차령산맥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는 제천 (堤川), 배론, 원주(原州)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안성(安成),용인(龍仁),서울로, 남쪽으로는 공주 (公州), 전라도로,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지는 네거리였다.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 경이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배티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그 후 1830년 무렵으로 추정될 수 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다.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발래기, 통점, 동골, 새울,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지구머리, 지장골, 굴티 등 10여 군데가 넘는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순교자 55여명(교회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갔다. 이 일대에서 배티 인근만큼 깊은 산골짜기도 없었다. 그 중에서도 삼박골은 배나무 고갯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백곡에서 배티로 오는 길 중간에 '삼박골 비밀통로'라는 푯말이 하나 나오는데 이 통로로 걸어가면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배티성지로 나오는 지름길이 된다. 예전의 교우들은 외교인을 피하여 이런 조그만 길로 다녔었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순교자의 묘소만 남아있는 삼박골은 병인박해 당시에 장 베르뇌 주교님이 숨어들었던 공소이기도 했다.지금은 집터나 돌담의 흔적, 우물터만이 겨우 남아 있지만, 마을 뒷편에는 유명한 신자인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의 묘소만이 남아 있다. 왼쪽 골짜기에는 유사시에 배티로 도망하던 신자들의 비밀 통로가 있다. 이처럼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 있다는 것이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어렵게 터전을 잡은 이곳에서도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다. 신앙 생활은 언제나 감추어진 상태였고, 교회 서적이나 성물도 충분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죽는 날까지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신자들은 1850년 초에 최양업 신부를 모시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최 신부가 거처로 정한 곳이 바로 배티 이웃에 있는 동골 교우촌이었는데, 당시 이곳에 있는 그의 친척집에는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살고 있었다. 또 산너머에 있는 서덕골 교우촌의 백부 댁에는 둘째 아우가 있었다. 최양업(1821-1861)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사제이다. 그는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유학을 떠나 서구사상을 처음으로 배운 한국 최초의 유학생이다. 그는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님께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고 그후 고국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9년 12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입국한 최 신부는 용인 학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찾아본 후 즉시 신자들을 찾아 나섰다. 최양업 신부는 위대한 목자요 백색 순교자이다. 1861년 선종하기까지 12년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순회하며 목자없는 양처럼 지치고 방황하는 신자들을 찾아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과로로 죽은" 착한 목자이다. 배티성지의 성당은 최양업 신부님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웬만큼의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특히 성당안의 십자고상은 여느 다른 십자고상과 다른 모습이다. 힘에 겨워 사지가 늘어진 예수님의 모습. 다리가 벌어진 채로 달린 예수님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성지를 나와 고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최양업신부님 성당터라는 곳이 나오는 데 신부님께서는 7,8월 장마때는 이곳에서 머무르시며 '천주가사'와 '성교공과'를 집필하기도 하시며 지내셨다고 한다. 배티성지에는 양업교회사연구소가 있다. 청주교구 배티 순교 성지의 담임 류한영(베드로) 신부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해 연구하고, 그 현양 활동과 시복 시성 작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최양업 신부님 서품 150주년이 되는 1999년을 맞이하여 최 신부님께서 신학생으로 선서를 하고 마카오로 출발한 12월 3일에 최 신부님을 주보로 모신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창립하고 이를 운영하고 있다.
배티 무명 순교자의 묘
병인박해 당시에 배티에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아가던 교우들에게도 박해의 시련은 피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누가 얼마나 순교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배티 성지 부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보면 당시 순교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가 있다. 특히 안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점에 있는 배티는 당시에 처형을 하기 위해 끌고가던 순교자들이 꼭 넘어야 할 고개였다. 배티 성지를 나와 안성으로 가는 고개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으로 조그만 비석이 하나가 나온다. 바로 6인의 무명순교자 묘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지점인데 여기서부터는 산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한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오솔길을 가다보면 순교자묘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부터의 경사가 만만치 않다. 6인의 무명순교자의 묘를 내려와서 다시 안성방면의 고개로 1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또 하나의 무명순교자 묘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14인의 무명순교자 들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데 이들은 기구하게도 박해시에 안성으로 넘어 가다가 포졸들이 집단으로 처형을 한 순교자들이 묻혀있다. 그 중에는 아이의 무덤도 있다고 하니 그 당시의 비참함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명 순교자 6인의 묘로 가기위해서는 두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배티 성지 야외성당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이길로 가면 2시간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산을 오르는 길이 가파른 편이어서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상당히 어려운길이다. 다른 한가지의 방법은 배티성지에서 나와 고개방면으로 20분정도를 가면 카페를 지나고 그 다음 고개부근에 왼편으로 입구를 알리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부터는 아스팔트길이 아닌 오솔길이 시작되는데 20분 정도를 걸어올라가면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도 경사가 만만치 않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9명은 교회 역사에 기록돼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무명 순교자라는 또 하나의 이름. 이곳에 잠들어 계신 순교자들은 어쩌면 더 많은 영광을 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하느님을 만나는 영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순교의 영광과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어 성인으로 또는 순교자로 기억되는 그들보다 더 많은 영광을 하늘에서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름만 화려한 향기없는 꽃보다 무명의 향기로운 꽃이 아름답다.
'聖地巡禮'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서울 천주교 성지 1 (0) | 2006.05.18 |
---|---|
[스크랩] 솔뫼, 성거산 성지 (천안) (0) | 2006.05.18 |
[스크랩] 제주 관덕정, 황사평 묘 (0) | 2006.05.18 |
[스크랩] 황새바위 성지 (공주) (0) | 2006.05.18 |
[스크랩] 한티성지 (경북 칠곡 ) (0) | 2006.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