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

[스크랩] 서울 천주교 성지 1

뚜르(Tours) 2006. 5. 18. 15:18


옛 용산신학교 성지, 현 예수 성심성당

 

서울 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지금은 성심여자고등학교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옛 용산신학교 성당과 예수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일명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신학교 등 여러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옛 용산신학교 성당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었던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소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31년 조선 교구가 북경에서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갖은 고난과 질병을 이겨 내고 조선 땅으로 입국을 시도 하다가 결국은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조선을 향해 떠난 지 4년 만에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비록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개척해 둔 입국 경로를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한국 교회는 완전하게 조직을 갖춘 명실 상부한 교회가 된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1877년 한국에 입국해 1933년 서울에서 선종할 때까지 중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국 땅인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박해 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 조약 이후 지하 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더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성심신학교, 종현 성당, 약현 성당을 짓는 한편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유명한 뮈텔 일기는 자신이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임종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 써 둔 일기로 총 6천여 면의 분량에 주교 개인 사정과 재임 동안의 교회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 한국 교회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함벽정(涵碧亭, 현 원효로 성심여고 위치) 터에 마련된 예수성심신학교와 예수 성심 성당(일명 원효로 성당)은 현재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186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교구장 블랑 주교는 용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중 신학교 건물은 1892년에 벽돌조 2층으로 건립되었고,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되었다. 또 1890년에는 용산의 삼호정(三湖亭) 언덕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그 인근에 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삼호정 공소는 1942년 1월 용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까지 그 복음의 끈이 이어져 오고 있다.  건물이 위치한 곳은 한강을 바라볼 수 있던 함벽정(涵碧亭)이 있던 곳이었다. 지척으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성직자들이 참수된 새남터와 기해박해(己亥迫害) 에 많은 천주교도들이 피를 흘린 당고개가 보이는 곳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해인 1887년에 이곳을 매입하였다. 1892년 6월 25일 축성식(祝聖式)이 있었으며, 이날은 신학교의 주보(主保)인 예수 성심 축일이었다.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 건물이 되었다. 1928년 이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로 사용되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聖心修女會)가 한국에 진출함에 따라 이 수녀원에 양도되었다. 신학교 건물은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E. J. G. Coste)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하였고, 청국인(淸國人)이 시공을 하였다. 사용 재료인 벽돌은 용산방(龍山坊) 와서(瓦署) 부근의 벽돌 가마에서 제조되었다. 건물 전면은 적벽돌을 사용하여 단순한 의장 특징을 나타냈으며, 벽면 대부분을 큰 원형 아치창으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학교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건물은 명동성당 주교관과 유사한 모습인데, 이것은 설계자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용산신학교 교사(校舍)는 1890년대 한국에 건립된 기독교 계통 교사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단순한 외관을 가진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원효로 성당은 용산신학교의 부속성당으로 1899년 착공하여 1902년 준공되었다.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다고 하는데, 코스트 신부는 이 건물이 착공되기 전인 1896년에 이미 별세했다. 코스트 신부가 별세 이전에 설계해 두었는지, 아니면 설계자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성당 건물은 언덕에 위치하여 성심학교에서 보면 3층, 수녀원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인다. 나르텍스(narthex, 현관부), 네이브(nave, 신도석부), 트랜셉(trancept, 십자형 돌출부), 엡스(apse, 聖所部) 등 아주 간결한 평면형식이다. 정면 출입은 계단실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외벽에는 회색벽돌과 적벽돌을 혼용하였다. 외벽을 돌아가면서 부축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2개의 부축기둥은 높이 돌출시켜 수직성을 강조하였다. 창문은 뾰족 아치창이다. 양식적으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절충하였다. 이 건물에는 한국 최초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영문 머리글자인 A. K.(Andre Kim)와 그의 생존 연대(1821~1846)가 기록되어 있고, 1942년까지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는 뮈텔 문서. 기해 일기 등을 저술하고 황사영 백서의 원몬이 발견되자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을 교황에게 진상하기도 하였다.

 


서울 왜고개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이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한자로는 와고개(瓦署峴)로 알려져있다.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내던 와고개 또는 왜고개에서는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했던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 떼 신세가 됐다. 그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방인 사제 양성을 의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 모두 이 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낸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탄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기에 이른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에 일단 암매장한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에 세 분 성직자의 시체를 다시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에게 알려 준다. 박순집은 부친의 뜻을 따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 및 다른 치명자의 시신을 바로 이곳, 왜고개에 안장한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 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명동 성당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성지

 


약현 성당

 


약현 성당

 

중림동 성당은 1886년의 한불 조약으로 박해의 시기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직후인 1891년 11월 9일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고, 103위 성인 중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비롯하여 44위의 순교자가 성인품에 오른 신앙의 못자리인 서소문의 순교 성지에 서울에서 두 번째, 전국에서 아홉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온 선열들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서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蔓川) 이승훈이다. '덩굴이 무성한 시냇물'이라는 다소 풍류적인 호를 갖고 있던 그가 태어난 곳은 서소문과 이웃한 반석골, 곧 지금의 중림동(中林洞)이다. 자신의 호와 같이 덩굴이 우거져 무성한 시내를 앞에 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 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盤石)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명문가에 태어나 이미 24세에 벼슬길에 나서 환히 열린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가 환난(患難)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 되면서 부터이다. 광암 이벽이 주도했던 이 모임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접하고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것이 1784년의 일이다.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1801년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1886년(고종 23)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이 체결된 뒤 서울에서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자 1887년에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여 강당을 짓고 교리를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이 완공되었다. 이 강당이 자리잡은 언덕이 서소문(西小門) 밖 약현(藥峴)이었으므로 여기서 약현 성당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또 성당 근처에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의 집이 있었고, 신유박해(辛酉迫害)·기해박해(己亥迫害)·병인박해(丙寅迫害) 때 44명의 천주교도들이 이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므로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1891년에 착공하였는데 당시 주임신부인 두세Doucet:한국명 丁加彌)가 공사를 감독하였고 이듬해 성당을 준공하였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1892년에 준공되었으며, 벽돌 구조로 건평 120평, 면적 1,309㎡이다.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의 지상 1층 건물로 프랑스 신부 코스트(Coste:한국명 高宜善)가 설계하였다.

 


서울 포도청 성지

 

포도청은 조선시대에 치안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오늘날의 경찰관서이다. 포청(捕廳)으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성종 때부터 중종에 이르는 동안에 그 제도적 완성을 본 것으로, 좌포도청 ·우포도청으로 나누어,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북동쪽(서울 종로구 단성사와 소방서 자리 일대)에 두고 한성부의 동부 ·남부 ·중부와 경기좌도(京畿左道) 일원을 관할하였고, 우포도청은 서부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동쪽(서울 종로구 종로1가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두고, 한성부의 서부 ·북부와 경기우도(京畿右道)를 관할하였다. 포도청은 병조(兵曹)에 딸린 무관직소(武官職所)로, 순조와 고종 때에는 좌 ·우 포도청에 각각 포도대장(종2품) 1명, 종사관(從事官:종5품) 3명, 군관 70명, 포도부장 4명, 포도군사 64명, 무료부장(無料部長) 27명, 가설부장(加設部長) 6명, 겸록부장(兼祿部長) 32명, 서원(書員) 4명, 사령(使令) 3명 등이 있었다. 좌 ·우 포도청에서는 각기 8패(牌:組)로 나누어서 패장(牌將) 8명과 군사 64명을 동원해서 담당구역을 순찰하였다. 1894년 포도청을 합하여 경무청으로 개편하였다.

◆ 사헌부

사헌부는 조선시대 3사(三司)의 하나로 당시의 정치와 풍속을 바로 잡고 관리를 감사하여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이 사헌부의 최고 관리로는 대사헌(大司憲)이 있었으며, 그 밑으로는 도제조, 제조, 장령 등의 벼슬아치들이 있었다. 박해시대에는 당시 영상(領相) 벼슬에 있던 조인영(趙仁永)은 섭정을 하면서 반종교적인 감사(監司)를 실시하여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이 중 천주교 중심 인물이 잡히면 이 사헌부에서 논의되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의금부

왕부 또는 금오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어명으로 사형선고를 내리던 최고재판소를 말한다. 주교, 신부, 그리고 유명한 평신도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 포도청(捕盜廳)

원래는 강도나 살인범을 취조하고 가두던 곳이었지만 우리 순교자들도 대부분 이곳 포도청을 거쳐서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취조 도중에 포도청 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들도 믾았다고 한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서도 이곳에서 옥사한 분이 15명이나 된다고 한다.

한때 우포도청 건물이 일제 때 헐리어 성북구 돈암동 512번지의 160호(삼선공원 내)로 이전된 것으로 알려져 1978년 12월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했으나 최근에 와서 이 건물은 고종 초에 사용했던 삼군부 청사 총무당(總武堂)으로 밝혀졌다. 총무당은 조선말 군사 업무를 총괄하던 정1품 아문인 삼군부(三軍府) 청사 중의 중심 건물이다.

◆ 전옥

전옥이란 형조 소관의 감옥으로 오늘의 교도소와 같은 곳이다. 전옥은 불결했고 옥리들의 사사로운 형벌이 많았기 때문에 전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들이 많았다.

◆ 조선의 중앙 정치기구

조선의 중앙 정치기구는 의정부, 승정원, 의금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춘추관, 성균관이 있었다. 의정부는 행정부서로 6조로 구성되었다. 6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의 6개이다. 승정원과 의금부는 왕권을 강화시키는 기구라고 볼 수 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은 삼사(三司)라고 하였으며, 이 삼사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일깨워주는 역할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기위해 비판하고, 왕이 그것을 고침으로서 정치가 바로잡히는 아주 좋은 효과가 나왔다. 그 중 사간원은 왕이 바른정치를 하도록 일깨워주는 기구이며, 사헌부는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는 기구이고, 홍문관은 왕의 정치 자문과 왕명의 대필을 맡았다. 춘추관은 역사편찬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조실록도 바로 여기서 나온곳이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 순교자

103위 성인과 124위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중에서 옥에서 장독으로 혹은 교살이나 참수 당하신 분들 중 다른 성지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분을 이곳에 올렸다. 대부분 서울 포도청에서 돌아 가신 분이나 다른 지방의 옥에서 돌아 가신 몇 분도 그분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모두 이곳에 기록하였다. 이로써 이 홈페이지에 103위 성인과 124위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및 두 분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김범우의 간략한 신앙생활의 일대기가 모두 등재되어 있다.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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