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덕정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로 옛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2동에 있으며 보물 제322호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건물로서 세종 30년 안무사(按無使) 신숙청이 병사의 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키 위하여 창건하였다. 창건한 후에 이 곳의 용도를 보면 연무를 지휘하고 사열하는 곳이었을뿐만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 쓰여졌다. 관덕이란 이름은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라 하여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탐라지>에 의하면 세종 30년인 1448년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 되었으며 이후 여러차례 개건과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그 수법으로보아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덕정 건물이 앉아 있는 방향은 동쪽이며, 전면 5칸, 측면4칸으로 단층 8작 겹처마집이다. 또한 이익공(二翼工)의 집으로서 처마가 길었던 것이 특징이며 사방은 개방한 정자양식이다. 가장 지형이 빼어난 곳이라는 뜻의 탐라형승(眈羅形勝)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李瑢)의 글씨이다. 또한 관덕정의 진수는 7폭의 벽화에 있다. 두보의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십장생도(十長生圖), 상산사호(商山四浩) ,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진중서성탄금도(陳中西城單琴圖), 홍문연(鴻門宴)등이다.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관덕정 바로 옆에는 사적 제380호인 '제주목관아지'가 있다
관덕정과 순교 역사
1901년 신축교안 때에 이곳 광장에서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땅에 복음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18C이후 100여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의 피와 땀은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려져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었던 당시 조선 땅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지방 관리나 유림들에 의해 빈발하였고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지방 관리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교인들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충청도 아산, 전라도의 지도(智島), 황해도의 장연(장연), 강원도의 이천(이천) 등지에서는 계속적인 교난 사건이 발생했다.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 혹은 무당 등의 인습에 젖은 지방민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의 신축교난이다. 이것이 바로 '이제수의 난'이라고 불리는 '신축교난'이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조세정책, 즉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봉세관)이 온갖 잡세를 거두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해 버리고 난민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과 결탁하여 비리를 행한 사례도 원인의 하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를 타도하려는 일본인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 세력, 그리고 생존을 위협받게 된 무당 등의 작용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제주시에 진입한 민군들은 신자를 포함한 양민 등 700여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서 깊은 관덕정 정자 앞 광장이 사형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촬영한 사진에는 교우들을 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관덕정 광장에 널려 있던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사시에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 된 상태로 있었다.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갔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있었다. 1903년, 조정으로부터 이 시신들을 매장할 자리로 황사평을 이양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황사평 순교 성지
제주 황사평 묘 순교비
황사평 묘역은 신축교난시에 희생된 순교자들이 묻혀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공동 안장지로 사용되고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래된 것은 1898년 도민의 주체적 노력의 결과였다. 그 후 1899년 파리 외방 전교회원과 한국인 각 1명의 성직자가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제주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설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1년, 신축교난이라는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의 원인은 단적으로 지적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 있었다. 왕실 내장원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봉세관의 과다한 조세징수로 도민들의 원성이 심해 갔으며, 봉세관의 마름으로 이용된 일부 신도들이 주민들의 오해를 받을 행동을 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무당들의 굿으로 인한 도민들의 정신적, 경제적 피해와 축첩 등 비윤리적 풍습에 강력히 반대하는 교회에 대하여 토착 세력의 기득권 수호를 둘러싼 갈등도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 일어선 민군들은 봉세관에 대한 항의, 부당한 조세 징수와 수탈의 시정을 요구하며 제주성으로 진입하였다. 결국 제주도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게 퍼지고 당시 이제수라는 관청의 포졸이 민란의 우두머리가 되어 제주도 민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이제수의 난'이라고 불리는 '신축교난'이다. 제주도민들은 봉세관과 천주교 신자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며 백성을 작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봉세관은 도피해 버렸고, 민군들은 공격의 대상을 교회측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700여명의 교인들과 양민들이 관덕정 등지에서 피살되었다. 사태가 진정되면서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교난의 수습에 나선 불란서 공사는 조선조정에 편지를 보내어 공동 안장지에 해한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였다. 1903년 제주목사 홍종우와 구마실 신부와의 접촉으로 블란서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이 원만히 이루어져, 동년(광무 7년) 4월에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게 되었다. 당시 별도봉 밑에 묻혔던 희생자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이장해 간 상태였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이장하였는데, 26기의 분묘에 28구를 모셨다. 황사평은 약 18,000평으로, 1984년에 공원묘지로 조성하면서 울타리 석축 공사, 성상 건립,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하여 이장하는 공사 등을 진행했다. 그 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재차 단장을 하고, 1995년에 신 아우구스티노(재준), 김 토마(영만), 양윤경 등 당시 순교자 28기를 합장하였다. 그리고 현 하롤드 대주교를 포함한 성직자들의 분묘를 이장 축복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 경남 통영에서 순교한 김기랑(펠릭스베드로)의 순교비를 이곳에 건립하였다.
김기량 순교비
황사평 순교자 묘역 내부의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김기량(펠릭스베드로)은 이 고장 출신으로 처음 영세 입교한 분이다. 제주도에 사제가 입도하여 공식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기 43년 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는 이 땅에 신앙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열성으로 힘쓰다가 마침내 장엄한 순교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다.
외국인 선교 사제 공덕비
황사평 순교자 묘역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세워져 있다. 1899년에 공식 설립된 제주교회는 초창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외국인 선교 사제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터전이 잡혀갔다. 이역 만리 먼 땅인 제주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이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제주도에는 55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사목활동을 했고 지금도 활동 중이다. 그중 이미 선종한 16명의 명단이 공덕비에 새겨져 있다.
헨리 대주교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헨리(H.W.Henry, 玄海) 하롤드 대주교는 미국 태생으로 한국에 입국한 후 광주대교구장으로 사목하다가 제주교회가 "제주 지목구"로 설정되면서 지목구장으로 착좌하였다. 대교구장에서 지목구장으로 이동된 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대단한 강등이라 하겠으나 헨리 대주교는 자원하여 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제주 지목구장으로 사목하던 헨리 대주교는 1976년 선종하였다.
라이언 신부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라이언(T.D.Ryan, 나 토마스)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1930년대에 제주도에 들어와 사목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귀포 본당에서 주로 사목을 하였다. 골롬반외방전교회 소속 羅 토마스 신부는 본당발전을 위해 서귀포의 중심지로 1937년 8월 15일에 본당을 이전, 현재의 "서귀포 본당"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후 제주도가 전쟁의 전진기지화하여 성당안에 일본군이 진주하여 미사전례를 거행치 못하고, 옥고를 치뤘으며 광복이후 석방된 羅 토마스 신부는 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947년 재부임하고, 1950년 한국동란 발발후 잠시동안 옛 홍로본당에서 성신대학의 대신학생의 피난학교를 운영하였다.
김병준 신부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김병준(요한) 신부는 1952년 목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이어 제주에 들어와 사목활동을 하였다. 신성여고 교장으로 오래 봉직하였으며 동문천주교회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2001년 선종하였다.
임승필 신부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임승필(요셉) 신부는 한림 태생이며 197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 오스트리아 및 로마 유학으로 성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9년부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 근무하면서 성서 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구약의 번역을 완성하고 신약을 번역을 진행하던 중 2003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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