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오박해 ◆ | ||
한자 | 丙午迫害 | |
1846년, 헌종(憲宗) 12년, 병오년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박해. 당시 한국에 입국해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포교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입국기회를 노리며 만주(滿洲)에 머물러 있던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런데 주교는 육로를 통한 입국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서해(西海)에서 비교적 안전한 바닷길을 찾아보도록 하기 위해 김대건 신부를 황해도로 보냈다. 1846년 5월 13일 서울을 떠난 김대건 신부는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白翎島)에 다달아, 중국 모인도(毛仁島)를 거쳐 한국에 은밀히 입국하는 해로(海路)를 구상, 배를 빌려 메스트르 신부 등을 데려올 방안을 살피던 중 순위도(巡威島)에서 포졸들에게 우연한 일로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배주인인 임성룡과 뱃사공 엄수(嚴秀) 등과 함께 옹진(甕津)의 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5일 후에는 해주(海州)로 이송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그의 신분이 알려지자 해주 감사는 일의 중대성에 놀라, 그를 곧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김 신부는 온갖 신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부임을 밝히며 천주교 탄압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세계의 정세를 알려 정부당국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교우들을 대라는 가혹한 추궁에도 굴하지 않고 이미 밝혀진 교인들만을 지적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와 관련된 10여명이 잡히게 되었는데, 그해 음력 6월에는 배주인인 임성용의 부친 임치백(林致白, 요셉) 등이 잡히고, 음력 7월 10일에는 일찍이 ≪기해일기≫를 지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이 잡혔으며, 8월에는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그 해 6월 하순 프랑스의 군함 세 척이 조선에 와서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亭),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모방(Maubant, 羅伯多祿) 등 프랑스인 세 성직자를 죽인 책임을 묻게 되자, 민심이 매우 흉흉하여 정부에서는 김대건 신부 등의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대건 신부에게는 그 해 9월 15일,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邪敎)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잡혀있던 교우들 가운데 배교한 자는 석방되고 신앙을 지킨 교인은 모두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 결과 김대건 신부는 그해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고, 김 신부의 뒤를 이어 끝까지 신앙을 지킨 현석문 등 남녀 교우는 그 해 9월 20일 모두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 때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임치백(林致白, 요셉), 우술임(禹述林, 수산나),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등 9명이었다. 페레올 주교는 이들 9명의 순교사실을 ≪기해일기≫에 첨가하여 ≪기해 · 병오 순교자전≫을 프랑스어로 편집하고, 그것을 최양업 신부가 라틴어로 옮겨 로마에 보냄으로써, 로마에서는 이 문헌을 토대로 1857년 기해 및 병오박해의 순교자 중 82명을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였고. 이들 중 79명이 1925년에 복자위에 올랐다가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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