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인박해 ◆ | ||
한자 | 丙寅迫害 | |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충의 서학(西學)에 대한 사갈시(蛇蝎視), 즉 천주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증오심에서 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척사(斥邪)를 요구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도 안중에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족속으로,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유인한다”고 하여,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았다. 위정자들은 또 신유년(辛酉年, 1801년)의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飼永帛書) 사건을, 한 교인의 생각이 아니고 프랑스의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천주교의 신조인 것처럼 몰아세워 보수적인 배외사상(排外思想)을 부추기는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병인박해의 원인(原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으로부터 비롯된다. 1864년, 고종 1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로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 고관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1865년 음력 9월, 러시아인 수십 명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여 왔다. 이것이 대원군과 천주교가 교섭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격동하는 정세의 변천 속에 천주교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은 나라를 구하고, 신앙의 자유도 얻는 호기(好機)를 놓치면 안 된다는 조바심에서 고종의 유모인 박(朴) 마르타를 불렀다. 그리고 “왜 이같이 가만히들 앉아 있는가? 노국 사람들이 한국을 침략하려 든다. 지금 이러한 불행을 틀림없이 막아낼 수 있는 주교가 필요한데 그들이 지방에 출장중이다. 서한을 만들어 대원군께 제출하라. 나는 성공을 보증한다. 그리고 곧 주교를 불러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박 마르타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거처하고 있는 집주인 홍봉주(洪鳳周)에게 그 말을 전하고 홍봉주는 승지(承旨)인 남종삼(南鍾三, 요한)에게 청원서의 작성을 간청하여 동의를 얻었다.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프랑스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프랑스인 선교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작성하여 직접 대원군에게 올렸다. 이것을 보고 대원군도 만족하였다. 다음 날 대원군은 남종삼을 다시 불러 천주교에 관하여 오랫동안 이야기하였다. “그대는 주교가 노인(露人)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라는 물음에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원군은 또 물었다. “지금 주교가 서울에 있는가” “아닙니다. 방금 황해도에서 포교중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남종삼에게 “그러면 내가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주교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때가 1865년 약력 12월 말경인 듯하다. 대원군은 만일 러시아인을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요지를 한국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 주교에게 전해 달라고 한 것이다. 대원군과 남종삼과의 이런 대화내용이 알려지자 천주교인들은 종교자유의 날이 가까워진 것으로 알고 무척 기뻐하였다. 그런데 베르뇌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보낸 보고를 보면 “러시아인이 조만간 한국에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 확실하므로 러시아인의 위험을 누구 못지 앉게 느낍니다. 그러나 열강(列强) 중 어느 나라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한국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이런 위험을 예방할 방법이 나에게는 없습니다”한 것으로 보아,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과의 교섭에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주 북경 프랑스 공사관에 서신을 보내어 종교자유를 청하러 오도록 하라”는 요청을 대원군의 부인으로부터 비밀리에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사실 서울의 고관들이 프랑스 함정의 내항을 원하고 있습니다만 나로서는 대원군과 먼저 협의하기 전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결심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아무튼 대원군을 만난 뒤 남종삼은 곧 여비를 주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도록 수배하였다. 주교들이 서울에 당도한 이틀 뒤에 남종삼은 대원군을 또 방문하였다. 때는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이었으니 전에 대원군을 만난 지 약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런데 대원군은 전과는 다른 태도로 그를 상당히 냉정하게 맞았다. “그대는 왜 아직 서울에 남아 있는가. 부친에게 인사차 시골로 내려간 줄 알았는데” 하며 말문을 막았다. 남종삼이 “물론 시골에 가야합니다만 중요한 일도 있고 해서 서울에” 하는 말을 대원군이 또 가로막으며 “알았어, 하지만 이젠 급한 일이 없네, 두고 보세. 부친을 만나면 모든 것을 상의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동안에 정세는 너무나 격변되어 있었다. 대원군의 태도가 표변한 원인은 북경에서 한국 사신이 보내온 서신에서 그 진원(震源)을 찾아야 된다. 중국에서 자행된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사실을 전한 이 편지는 1866년 양력 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1860년 10월 영불(英佛) 연합군에 의한 북경함락은 종교자유에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무서운 보복을 받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중국 도처에서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 대로 살해되었다. 한국 사신의 이 서한은 천주교에 반대하는 고관들로 하여금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교섭을 공공연히 비난받게 만들었다. 이에 대원군은 과거 중국에서의 영불군의 승리를 상기시키면서 한국도 그런 침략을 당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관들은 그것이 모두 헛된 기우라고 주장하고, 기해년(1839년)의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사건을 들어 “과거에 양인을 죽였다고 해서 누가 우리에게 복수를 했으며 또 이로 인하여 우리가 받은 손해는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풍양조씨(豊壤趙氏)인 조대비까지 천주교도의 책동을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의 체포령에 서명하였다. 한국천주교의 최대 수난 : 고종 3년에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2월 23일(음 1월 9일) 베르뇌 주교를 선두로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등이 포청(捕廳)에 잡혀감으로써 박해의 서막이 올랐다. 이날 문초에서 배반자인 이선이가 남종삼을 고발하였다. 2월 25일 정부는 이국인(異國人)을 데리고 온 곡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포청에 명하는 동시에 남종삼이 제천(堤川)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여, 그를 격식을 갖추어 잡아오도록 하였다. 3월 1일까지 프랑스인 신부 3명과 평신도인 정의배(丁義培), 전장운(全長雲), 최형(崔炯)이 잇달아 잡혔는데 그들은 모두 이선이가 밀고한 것이다. 이선이는 베르뇌 주교한테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홍봉주로부터 천주교를 알게된 자로, 잡혀간 뒤 주교를 위시하여 선교사, 교회, 저명인사 등 그가 아는 한 모든 것을 고발하고 철저히 배교하였다. 2월 25일 정부는 이미 체포된 죄수를 포청에 가두고, 남종삼의 체포를 기다려 국청을 차리고 모두 함께 심문할 것을 명하였다. 3월 1일(음 1월 15일) 남종삼이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체포되었다.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고 의금부(義禁府) 남간(南間)에 가두는 한편 베르뇌 주교, 홍봉주 등 포청에 있던 9명을 모두 남간으로 이송하고 문초를 개시하였다, 3월 2일에는 남종삼과 홍봉주에 대한 추국(推鞠)이 있었고, 다음날에는 한국인만 모두 심문했으며, 선교사에 대한 심문은 3월 4일에 시작이었다. 이 날은 또 이미 압수된 천주교 서적과 그 판본(版本)을 국정(鞠庭)에서 불태우라는 왕명이 내렸고, 전국에 분포된 천주교 서적을 일체 압수하여 소각하라고 명하였다. 3월 7일 남종삼과 홍봉주는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되고, 같은 날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eniere, 白)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이 집행되었으며, 형조로 이송된 최형과 전장운은 3월 9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어 3월 11일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nicolas, 朴) 신부가 새남터에서,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위앵(Huin, 閔) 신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 장주기(張周基), 황석두(黃錫斗) 등이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이렇듯 박해가 치열해 지자 피신해 있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이해 7월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천진(天津)으로 가서 그 곳에 머무르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박해 상황을 알렸고, 이에 따라 로즈 제독은 이해 10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위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그러나 대원군은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프랑스 함대가 진출했었던 양화진(楊花津, 현재의 切頭山)에서 이의송(李義松), 김이쁜(金--) 부부와 아들 이붕익(李鵬翼)을 비롯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한편 지방에서도 박해는 치열해져 11월 경상도 문경(聞慶)에서 이제현(李齊賢),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등이 처형되고 12월에는 전주 숲정이에서 조화서 · 조윤호 부자(父子), 이명서, 정문호, 정월지, 손선지, 한원서 등이 순교했으며, 1867년에 접어들어서도 박해는 계속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투옥 처형되었다. 이러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은 1868년 4월(음)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南延君)묘 도굴사건으로 인해 더욱 굳어져 갔다. 오페르트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그 유해를 미끼로 조선의 개국을 요구하려 했으나 충청도 덕산의 남연군묘를 도굴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주춤했던 박해는 다시 가열되어 장치선(張致善), 최인서(崔仁瑞), 김계교(金季釗), 이신규(李身逵) 등이 처형되었다. 그후 1869년과 1870년 2년 동안 박해는 잠시 가라앉았으나 l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치열해졌고, 대원군은 전국의 각 요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1873년 그가 실각할 때까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1866년 초부터 시작되어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치열해진 박해는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되었다. 이 기간 동안 조선교회는 근거를 잃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처형된 순교자만도 8,000~2만 여명으로 추정되며, 그나마 살아남은 신도들은 집과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피로 자라난 조선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시복 수속을 위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일기≫를 간행하였다. ≪치명일기≫에 수록된 877명의 순교자 중 24위는 1968년 복자위(福者位)에, 그리고 1984년에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慶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분도출판사, 1980 / 崔奭祐, 丙寅迫害資科硏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68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硏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역사 - 그 뒤안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교구(朝鮮敎區) (0) | 2006.07.12 |
---|---|
병인양요(丙寅洋擾) (0) | 2006.07.12 |
병오박해(丙午迫害) (0) | 2006.07.12 |
기해박해(己亥迫害) (0) | 2006.07.12 |
신유박해 (0) | 2006.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