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광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뚜르(Tours) 2006. 7. 12. 12:28
김대건 ◆
한자 金大建

   김대건(1821~1846). 최초의 한국인 신부. 순교자.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대건은 관명(冠名)인 듯. 본관은 김해(金海).

   1. 생애 :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忠南 唐津郡 牛江面 松山理)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金濟俊)과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이었으나 천주교로 말미암아 전락하였다. 그러나 모범적 신앙생활과 순교자들들을 배출함으로써 한국교회사에서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이 집안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한국 천주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래 그는 1791년의 박해 때부터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고백했고, 1801년에는 유배되었으며 1805년 해미(海美)에서 다시 잡혀 10년 동안의 감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끊임없는 박해로 말미암아 자연 이 집안은 많은 가족이 한데 모여 살기가 어렵게 된 것 같고 그래서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金宗漢)은 어느새 솔뫼 고향을 버리고 안동(安東)으로 피신해 살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잡혀 대구(大邱) 감영으로 이송되어 거기서 이듬해 참수(斬首) 순교하였다.

   그 후 김진후의 둘째 아들, 즉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金澤鉉)도 박해 때문에 솔뫼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였던 것 같다. 김택현은 서울의 청파(靑坡)를 거쳐 용인(龍仁) 땅 골배마실[寒德洞]에 정착하였다. 그 때 김대건의 나이 7세였는데, 그는 여기서 그의 나이와 그의 신분에 적합한 한문공부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1836년 초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가 입국하자 곧 서울의 정하상(丁夏祥) 집에 거처하던 모방 신부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서울에서 부활절(4월 5일)을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공소순방에 나섰는데, 그는 먼저 용인지방의 골배마실에 이웃한 ‘은이’ 공소에 들러 아주 열심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 김대건을 보고 총명한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신학생으로 간택하였다. 이 때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김대건은 곧(7월 11일) 서울로 올라와 이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같은 또래의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와 함께 한문과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박해 때문에 이들은 국내에서 성직자로 교육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모방 신부는 연말의 동지사편을 이용하여 우선 그들을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세 소년 중 김대건만은 수련기간이 짧아 처음에 같이 보내기를 주저했으나 다시 그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결국 함께 보내게 되었다. 세 소년은 출발에 앞서 모방 신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장차 조선 포교지장상신학교 교장에게 절대 순종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 다음 이튿날, 즉 12월 3일 예정대로 서울을 떠났다.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약 10명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유 신부는 조선 포교가 어렵게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정하상 등은 세 소년을 국경까지 인도하는 동시에 새 선교사를 영입(迎入)하게 되어 있었다.

   일행은 12월 28일 변문(邊門)에 도착해 대기 중인 조선 선교사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신부를 만났다. 세 소년샤스탕 신부를 조선 국경까지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요동(遼東)과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을 횡단한 끝에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Legregois) 신부는 당시 페낭 신학교[파리 외방전교회 경영의 동양인 성직자양성소]의 중국인 학생들의 정신이 좋지 못해 조선인 신학생들을 거기로 보내지 않기로 하는 한편 새로 임명된 조선교구장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들을 경리부에서 맡아 교육하기로 하였다. 처음에 칼르리(Callery)[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가 조선 신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했으나 곧 르그레즈와 신부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장인 동시에 교사, 사감, 의사 등의 역할까지 하였다. 칼르리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성가를 통해 발성법까지, 르그레즈와 신부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이들이 교리라틴어에서 보인 성적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에게 많은 희망을 갖게 하였다. 칼르리 신부는 한때 만주에 조선신학교를 세울 계획도 가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대건 등은 마카오에 도착한지 2개월 만인 8월에 마카오에서 일어난 민란(民亂) 때문에 잠시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또 1년 후(1838. 11. 27)에는 최방제와 사별(死別)해야 하였다. 칼르리와 르그레즈와 신부만이 아니라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 데플레시(Desfleches) 신부 등도 조선 신학생의 교육을 도왔다. 데플레시 신부는 중국 사천교구(四川敎區) 선교사로서 마카오에서 입국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후 사천주교).

   1839년 아편 거래로 인해 광동(廣東)과 마카오에 다시 민란이 일어나 4월 초 김대건과 최양업은 또 마닐라로 피신해야 하였다. 칼르리, 데플레슈 신부들이 그들을 동행하였다. 그들은 4월 한 달을 마닐라의 도미니코수도원에서 지내고 5월초부터는 마닐라에서 30리 떨어진 롤롬베이(Lolombey)의 수도원 농장으로 가서 그 해 11월 마닐라로 돌아올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이곳은 경치도 아름답고 거처도 넓고 편하였다. 데플레슈 신부로부터 매일 강의를 들었고 또 자주 외출하면서 식견을 넓혔다. 8월에는 뜻밖에 고국으로부터 소식도 받았다. 모두가 건강했으나 김대건만은 복통, 두통, 신장병 등을 앓았다. 11월 마카오의 상태가 좀 진정되자 그들은 마카오로 돌아왔다. 데플레슈 신부가 곧 임지로 떠났으나 1840년부터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가 김대건과 최양업의 교육을 도왔다. 이들은 이해 9월에 마카오에 도착했는데, 메스트르 신부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경리부의 일과 조선 신학생의 교육을 도왔고, 베르뇌 신부는 임지인 통킹으로 떠날 기회를 기다리면서 약 100일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1842년을 맞았다. 이 해에 김대건과 최양업은 뜻밖에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때는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다. 차제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이권(利權)을 얻어 보려는 목적에서 중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동시에 2척의 군함으로 하여금 중국 해안에서 시위하게 했는데, 하나는 세실(Cecille)이 지휘하는 에리곤(Erigone)호였고, 하나는 파즈(Page)가 지휘하는 파보리트(Favorite)호였다. 세실 함장은 차제에 조선과 통상 조약을 추진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카오 경리부 책임자 리브와 신부를(그 동안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로 전임되었다) 방문하고 그의 조선원정을 위해 조선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리브와 신부세실의 계획이 평화적일 뿐더러 이것이 몇 년째 두절된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재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세실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더러 조선인 신학생과 세실 함장 사이의 통역을 돕기 위해 메스트르 신부까지 동행하게 하였다.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을 택하였다. 그는 군함에서의 생활조건이 병약한 김대건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김대건은 자주 앓았고 군함에 탑승할 당시도 독감을 앓고 있었다. 김대건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에리곤호는 마닐라, 대만을 거쳐 주산(舟山)에서 2개월쯤 체류한 후 다시 북상, 6월 27일 오송구(吳淞口)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조선으로 떠나기를 기대했으나 상황의 변화로 그 희망은 사라졌다. 남경의 함락과 더불어 청국이 영국 측에 강화제의함에 따라 남경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세실은 남경으로 가려했으므로 김대건은 통역관의 자격으로 그를 동행하였다. 8월 29일 남경조약에 참석하고 오송구로 돌아오니 최양업만주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de Bruniere) 신부가 탑승한 파브리트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건은 최양업만나게 되니 무척 기뻤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곧 슬픔으로 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으로 가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최양업 일행은 하선했으나 김대건 일행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에리곤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실은 환자가 많고 또 조선으로 갈 시간의 여유가 없다고 하며 마닐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그래서 김대건 일행도 9월 11일 에리곤호를 하직하고 강남교구장 베지(Besi) 주교관으로 가서 최양업 일행과 합류하였다. 베지 주교의 알선으로 이제 그들은 중국배를 타고 다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김대건 일행은 10월 2일 상해를 떠났다. 도중 역풍을 만나 곤욕을 겪기는 했으나 10월 22일 태장하(太莊河) 부근 요동땅에 이르렀다. 최양업이 먼저 내렸고 김대건은 선교사들과 같이 밤에 상륙할 계획이었으나 대낮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 때 세관에서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몰려와 신부들을 포위하고 여러 가지로 힐문하였다. 김대건은 재치와 열변으로써 그들을 쫓아버렸다. 일행은 우선 두(杜) 회장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 교우들이 신부들을 유숙시키기를 거절하므로 최양업 일행은 양관(陽關)으로 가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백가점(白家店)에 머무르면서 입국을 시도하게 되었다. 김대건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메일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강의를 들었다.

   11월 7일 변문을 다녀온 중국인 보행꾼이 조선에 박해가 있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입국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만주교구베롤(Verrolles) 주교는 그들의 결심이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에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의 위험을 덜어 주고자 입국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김대건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성모의 도우심에 절대적 신뢰심을 갖고 입국의 모험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12월 23일 변문으로 떠났다. 변문에 이르러 다행히 북경으로 들어가는 사신 일행 중에서 김 방지거를 만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비로소 조선 교회에 대한 확실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기해년(1839년)의 박해선교사들이 모두 순교했을 뿐더러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를 위시하여 200여명의 교우들이 순교했다는 것이다. 김대건은 김 방지거와 작별하고 단독으로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는 국경선을 넘어 의주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위험을 느끼고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눈 위에 쓰러져 동사할 뻔했으나 기적처럼 살아남아 백가점으로 돌아왔다(1843. 1. 6).

   김대건은 1843년 음력 3월에 다시 변문으로 가서 북경에서 돌아오는 김 방지거를 만나고 팔가자(八家子)로 갔다. 음력 9월에 김대건은 세 번째로 변문으로 가서 김 방지거를 만나고 동북국경쪽 입국방법을 의논하고 팔가자로 돌아왔다. 이어 12월 31일 양관으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하고 주교와 같이 봉천(奉天)으로 가서 이듬해 1월 24일 김 방지거를 만났다. 김 방지거는 당장은 선교사의 입국이 어렵고 1845년 초에나 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으로 하여금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방법을 시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김대건은 2월 4일 팔가자를 출발, 3월 8일 훈춘(琿春)에 도착, 두만강을 건너 개시(開市) 기간을 이용하여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만났다. 그러나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하고 팔가자로 돌아왔다(4월). 약 2개월 동안 그는 2,000리 길을 걸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겪은 그의 여행은 병약하던 그의 체질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그의 기력과 타고난 대담성을 더욱 원숙하게 해주었다. 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같이 이 해에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 삭발례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12. 15 이전) 연령 미달(법정 연령 만 24세)로 사제품까지는 받지 못하였다. 12월 말 김대건은 주교와 같이 김 방지거를 만나기 위해 팔가자를 출발, 이듬해 1월 1일 변문에서 김 방지거를 위시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하므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만을 입국시키기로 하고 김 부제에게 해로로 상해에 오도록 지시한 후 자신은 마카오로 가서 김 부제의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편 김 부제는 타고난 기지와 대담성으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국경선을 넘는 데 성공,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 중병까지 앓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조선지도를 작성하고,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무엇보다도 상해길을 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였다. 마침내 준비를 완료한 김대건 부제는 4월 30일 11명의 사공과 같이 작은 배, 즉 라파엘호에 탑승, 상해를 향해 제물포를 떠났다. 두 번의 풍파와 해적을 만나는 등 1개월여의 모험 끝에 오송구를 거쳐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 부제는 곧 그의 도착을 페레올 주교에게 알렸고 이어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상해로 왔다.

   페레올 주교는 출발에 앞서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巷)에서 김대건 부제에게 사제서품을 주었다. 이로써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일주일 후 김 신부는 만당(萬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올렸다. 신품성사은총미사성제의 봉헌으로 더욱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된 김 신부는 그의 라파엘호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8월 31일 상해를 출항함으로써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제주도에 표착하는 등 큰 위험이 없지 않았으나 40여일 동안의 모험 끝에 10월 12일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할 수 있었다. 김 신부는 곧 서울로 올라와 서울과 그 인근, 특히 용인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의 깊은 신앙신심, 놀라울 만치 유창한 말씨는 단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었다. 이 때 김 신부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났고 또 어머니 곁에서 부활절(4. 12)을 지내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이어 김 신부는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 통로의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중국어선과 연락을 취하고자 5월 14일 7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마포를 출범하였다.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러 청국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탁송(託送)하고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 6월 5일 그 곳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등산진영(登山鎭營)에서의 취조에 이어 5일 후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4차의 문초를 받았다. 중국어선에 탁송했던 편지와 지도의 압수와 더불어 사건이 심각해짐에 따라 김 신부는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 갇히게 되었다(6. 21). 그 다음날부터 그는 좌우포청에서 7월 19일까지 무려 40차의 신문을 받았다. 7월 20일 김 신부르그레즈와리브와 등 선생신부들에게 하직 편지를 썼다.

   김 신부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도 2매를 영어에서 번역 작성했고 또 지리개설서를 편술하였다. 그러는 동안 세실이 기해년에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기 위해 서해안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8. 20). 정부는 김 신부를 전권대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었고 그래서인지 김 신부 자신도 미구에 석방되리라는 일루의 희망을 가졌었다. 뿐더러 일부 정부의 고관들도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고결한 인격에 감동되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정에 보내고 또 서해안에서 물러감에 따라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 신부의 사형이 앞당겨지게 되었다. 김 신부도 순교를 각오하고 페레올 주교와(8. 29) 교우들에게 하직편지를 썼다. 9월 15일 연석(筵席)에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은 김대건이 외국인과 교섭했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대신들도 이에 동조함에 따라 김대건에게 군문효수의 형이 내렸다. 이에 따라 김 신부는 그날로 또는 그 다음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김 신부의 시체는 40일 후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안장되었고, 1901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었으며, 1951년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1857년에 가경자, 1925년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됨으로써 성인위에 올랐다. 또한 김 신부는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의 주보이다(1949년 이래).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에 의해 1972년 5월 14일 절두산 성당광장에 건립되었다.

   2. 저술 : ① 22편의 서한 : 이 서한들은 은사르그레즈와리브와 신부를 위시하여 교구장 페레올 주교, 조선교우 등에게 보낸 것이다. 1편의 한문서한과 1편의 한글서한을 제외하면 모두 라틴어 서한이다. 이 서한들은 물론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활동, 사상과 영성을 연구하는 데 불가결의 사료이고 더 나아가서 당시의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② 2편의 라틴어 작문 : 마카오 유학 초기에 작성된 것이다. ③ 한국교회사에 관한 3편의 비망록 : 즉 초기교회사 개요, 기해박해, 기해박해순교자 전기이다. 이상의 비망록은 1845년초에 입국한 김대건 부제가 잠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작성한 것으로서 상해를 통해 마카오리브와 신부에게 전달된 것이다. 김대건 부제는 물론 당시 교우들의 증언과 특히 ≪기해일기≫를 바탕으로 하여 이 비망록들을 작성했을 것이지만 그 중에는 예컨대 조선의 전통적인 민속신앙에 대한 비판 등 독창적으로 생각되는 점도 없지 않다. ④ ‘조선전도’(朝鮮全圖) : 일종의 행정지도인데 이것 역시 김대건 부제가 1845년초 잠시 입국 기회를 이용하여 작성했을 것이 확실하다. 그 후 이 지도는 상해의 프랑스 영사관을 거쳐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이 지도는 곧 지리학계에 소개되어 조선에 관한 불완전한 지식을 보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지도에는 아직 경위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는 등 과학성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명이 많고 또 그 지명들이 처음으로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참고할 점이 많다는 호평을 받았다. 조선 선교사들은 그 후 이 지도를 바탕으로 조선지도를 완성시켰는데 이것이 달레(Dallet)의 <조선지도>이다. 이 밖에도 김대건 신부는 서울에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정부당국의 요청으로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지리개설서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이 저술들은 오늘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3. 사상과 영성 : 이 세상을 창조한 임자와 이 임자에 대한 효애(孝愛)는 김대건의 사상과 영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건은 그리스도교하느님[天主]을 ‘임자’로 표현하였다. 임자이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그러나 한 번 알아본 후 그를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닌 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임자에 대한 절대적 효애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순교를 통해 솔선수범을 보였다. 김대건의 임자사상과 임자에 대한 효애적 신심(信心)은 박해시대 교우들의 ‘대군대부’(大君大父)사상과 ‘애주만유지상적’(愛主萬有至上的) 신심을 대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임자에 대한 효애는 김대건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대리하는 교회 장상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김대건은 출국에 앞서 교회 장상에 대한 순종을 선서한 이래 이 선서에 끝까지 충실하였다. 그는 입국의 길을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령에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의 죽기까지(순교) 순종하였다.

   김대건의 효애적 순교는 동시에 형제와 민족을 위한 대속(代贖)을 의미하였다. 교회가 예수고난 중에 세워지고 또한 고난 중에서 자랐듯이 한국 교회도 고난 중에 자랄 수밖에 없다고 말한 김대건은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동시에 교우들에게 고난 가운데서 용감히 하느님을 증거하고 사랑 속에서 서로 봉사하도록 권고해 마지않았다. 김대건은 복음의 승리와 그리스도의 은총을 굳게 믿었으므로 그리스도 때문에 결박당하고 옥에 갇히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고 끝까지 예수의 편에 서서 악의 세력과 용감히 싸울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용감히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되면 비록 그가 기본교리를 모를지라도 김대건은 그에게 영세 주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성모에 대한 김대건의 심신은 각별하였다. 그는 위험을 만나면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성모의 도움을 청했고, 또 그의 보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김대건은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효애 가운데서도 부모에 대한 효성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순교하기 전에 그의 어머니를 보호해주도록 주교와 친구에게 간곡히 부탁함으로써 또한 효성을 지닌 인간성의 소유자임을 보여 주었다. 김대건은 종교자유를 허용하고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 내의 성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의 선각자로서 모든 이의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中 · 下, 분도出版社, 1979~1980 / Andre Kim, Missions-Etrangeres, Paris 1925 / Pro Corea(Collecta a R.P. Leone Pichon) Documenta 朝鮮聖敎史料; Pro Corea, Documenta 朝鮮聖敎史料; Pour la Coree Documents 朝鮮聖敎史料, ex Missione Seoul Corea, 1938 / 李元淳 · 許寅 編著, 金大建의 書翰, 正音社, 1975 / 金九鼎, 聖雄 金大建傳 , 京鄕雜誌社, 1961 / 首先鐸德 金大建, 명동천주교회, 1942 / 金大建朝鮮全圖, 韓國敎會史硏究所, 1975(非賣品) / 崔奭祐, 金大建의 朝鮮全圖 · 韓國文化의 諸問題, 國際文化財團出版部, 1981.

'성인들의 영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빌라의 대데레사  (0) 2006.07.21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0) 2006.07.12
남종삼(南鍾三, 요한)  (0) 2006.07.12
성모승천 대축일  (0) 2006.06.14
성 스테파노  (0) 200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