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성모 마리아 소개와 4가지 교의

뚜르(Tours) 2006. 10. 18. 14:01

 

마리아의 소개

 


1. 소개                 


 


 

마리아의 일생은 당신의 아들 예수의 일생에 온전히 달려 있으나, 신약성서 속에는 그리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리아 연표는 결정적이기 보다는 암시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연표는 우리에게 마리아의 한 생을 일목요연하게 보게 해주며, 강생과 구속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역할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름: 마리아/ 출생: B.C. 23(또는 20)/ 부친: 요아킴/ 모친: 안나/ 자녀: 예수/ 사망: ?

 

2. 연표


 


B.C 23/20 마리아가 안나와 요아킴으로부터 탄생하심

B.C 20/17 마리아를 성전에 봉헌하심

B.C 11/8 요셉과 약혼

B.C 7/6 예수의 잉태와 출산

B.C 6/4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예물

 

A.D 6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으심

A.D 6?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예수가 나자렛에서 생활하심(루가2,51)

 

A.D 27/28 마리아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심(요한2,1-11).

 

A.D 30 예수의 공생활 중에 아들과 함께 계신 마리아(마태 12,46-50 마르3,31-35 루가8,19-21 요한2,12-13).

 

예수께서 마리아의 믿음을 간접적으로 칭찬하심(루가 11,27-28).

A.D 30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요한19,25-27).

 

예수 승천 후 예루살렘의 어느 이층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하신 마리아(사도1,14).

 

지상생활을 끝내신 후에 승천하심(교황 12세께서 회칙 "무니피첸띠시무스 데우스"로 성모 승천 교리를 반포하심(1950년 11월 1일).

 

 

* 마리아의 4가지 교의

 


(1)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먼저는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어느 누구도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없었는데, 나중에 하느님의 말씀이 그러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태중에서 육체와 결합되어 육체의 법칙을 따라 탄생된 하느님의 말씀은 육체에 고유하고 육체에 속하는 출산 법칙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교부들이 거룩한 동정녀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DS 251).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채택한 것이다.

 

에페소 공의회에서 선포되기는 했지만 교회는 그 이전부터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러 왔다. 이미 3세기경의 기도문 [Sub tuum praesidium]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불려졌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 주교가 아리우스의 파문에 대해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하느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품안에 가지셨다고 적고 있다. 그 후로도 이 칭호는 아타나시오, 치릴로, 바실리오를 비롯한 가파도치아의 교부들에 의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특히 니싸의 그레고리오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정통 신앙의 기준이 된다고까지 주장했다. "만일 누가 성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Theotokos)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신성(神性)밖에 있는 것이다" (Epistola ad Cledinum a cledonio 101, PG 37, 177-180). 그리고 라틴 교부 암브로시오는 희랍어 'Theotokos'를 라틴어 'Mater Dei'로 번역하여 불렀다.

 

그런데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던 안티오키아 학파 출신의 네스토리우스 주교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이 호칭의 사용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 주된 논쟁거리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강생한 그리스도안에 분리된 두 개의 위격(신격과 인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 마리아는 신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신성과 결합된 인간을 낳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대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당시 교부들은 '속성의 교환(Communicatio idiomatum)'이라는 원칙을 통해 '하나의 위격 안에 두 가지 본성'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 등에 의해 논박을 받은 다음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비록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인성만 낳으셨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에페소 공의회는 교회의 전승대로 '하느님의 어머니'를 교회의 신조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2)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1. 교의형성의 역사

 

'평생 동정(Perpetua Virgo)'이라는 단어는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의 신앙고백문 안에서 명문화되었다(DS 422. 427).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 교의의 시초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고백되어온 신앙이기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성서의 복음 말씀은 마리아가 동정인 상태에서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루가 1,26-38; 마태 1,18-25). 초대 교부들은 이를 근거로 마리아의 출산 전(ante partum) 동정성을 언급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게 마리아의 동정성은 하느님이 이루신 세 가지 신비 중의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 신성의 보증이 되고 있다(Epistula ad Ephesios, XVIII-XIX). 유스티노는 창세 3,15과 이사 7,14을 인용하면서 마리아의 동정성이 이냐시오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한 가지 징표로 이해하고 있다(Dialogus cum Tryphone Judaeo 100: PG 6, pp.709-712). 이레네오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교회 신앙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간주한다(Contra haereses 5, 19: PG 7, pp.1175-1176).

 

이후 마리아의 동정성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대한 온전한 봉헌으로 해석되면서 마리아는 점차 '영원한 동정녀'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이미 클레멘스는 외경 [야고보 복음]을 인용하면서 평생 동정을 주장하였고,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모친에게 걸맞는 모습으로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옹호했다. 4세기 초엽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Petrus von Alexandreia, †311)는 마리아에게 이 칭호를 부여하였다. 서방교회의 암브로시오(Ambrosius,†397)와 아우구스띠노(Augustinus, 354-430), 동방교회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와 시리아의 에프렘(Ephram?,†373)은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관철시킨 대표적인 교부들이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노, 베드로 크리솔로고 등의 교부들에게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이 삼중형식으로 고백되고 있다. 이후 교부들의 이론들은 교회안에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확증되었다. 라테란 공의회(649)는 이 입장을 재천명하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교회헌장 52항, 57항).

 

2. 성서적 근거와 현대신학의 문제 (한국 가톨릭 대사전, "동정녀 잉태", 서공석)

 

 

동정녀 잉태 [라] Conceptio Virginalis [영] Virgin Conception

 

성모 마리아가 성령의 은총을 받아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였음을 말함.

 

 

[성서전승]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는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마태오 복음 1장 18-25절과 루가 복음 1장 34-35절에만 있다. "그러므로 동정녀 잉태 신앙은 일부 지역 교회에서, 그것도 비교적 늦게 생긴 셈이다"(정양모, <루가복음> 33). 바오로, 마르코,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바오로는 예수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조건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기 위해 "그 이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갈라 4,4)고 할 뿐 동정녀 출산이라는 예수의 유일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바오로는 동정 생활을 바람직한 것으로 권유하지만, 마리아의 동정으로 자기 의견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1 고린 7,25).

 

마태오 복음 1-2장과 루가 복음 1-2장, 이른바 예수의 유년기 사화는 전기적 저술이 아니라, 예수가 구약의 완성임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신학적 저술이다. 따라서 이 유년기 사화는 구약성서의 언어에 깊이 젖어 있다.

 

 

 

1)마태오 복음 1장 18-25절: '다윗의 후손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인데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요셉은 유대인 율법에 다라 그녀를 소박하려 하였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로 그녀를 맞아 들여 동침하지 안고 동거하면서 그녀에게서 태어난 예수를 자기 아들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마태오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 된 까닭을 밝혀서 그분이 메시아임을 말한다. 마태오는 그분의 동정녀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1,18.20). 그리고 그 잉태는 구약성서의 완성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한다. "보라, 동정녀가 몸가져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1,23). 히브리어 원문에는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라 하는데, 마태오는 70인 역 그리스어 역문을 따랐다. 마태오가 말하려는 것은 하느님이 예수로 하여금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녀에게서 탄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일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아들,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2)루가 복음 1장 26-38절: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남자와 정혼한 처녀"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게 한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와 수태를 알리는 말에 당황하여 천사에게 묻는다.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오실 터이니,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분은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니,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계약의 역사를 넘어서 창조에까지 시선을 돌리게 한다. 구약성서에서 성령은 하느님의 창조력이다. 태초의 혼돈과 어둠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면서 세상이 창조되기 시작한다(창세 1,2). 따라서 지금 마리아에게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창조이다. 무에서 만물을 창조한 하느님은 인류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싼다"는 말은 하느님이 구름으로 당신 현존을 더러내던, 광야에서의 장막과 이스라엘의 성전을 가리킨다(출애 40,34; 민수 9,15-22; 2역대 5,13-14). 마리아는 하느님이 현존하는 성전으로 묘사되었다. 천사는 이어서 석녀인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배려로 잉태하였다고 알리면서, 창세기 18장 14절을 인용하여, "사실 하느님께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덧붙인다. 마리아의 잉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기점으로 한, 석녀의 잉태사 안에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한 것이다.

 

3) 위의 두 사화는 서로 독립된 것으로 보일 만큼 자료의 사용에 있어서나 사화의 전개 양식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이미 두 사화가 다 구약성서의 언어에 젖어 있고 구약성서의 '예고 도식'과 '소명 도식'을 그대로 옮겨 사용하고 있다(G. Lohfink). 이 두 사화는 역사적 사실의 보도가 아니다. 이 사화는 이미 부활을 체험하여 예수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 공동체가 그 신앙 고백에서 출발하여, 그분은 영원한 왕좌에 임명된 분이므로 그분을 통해 구약성서의 약속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화는 그리스도론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중심에 부활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이 들어 있다. 즉 예수가 하느님이 아들이라는 것은 그의 잉태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진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사화를 역사적 사실의 보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텍스트의 내용을 넘어서는 일이다.

 

[전통적 이해]

 

19세기 후반 역사 비평 방법론이 신학에 도입되기 전까지 교회는 성서의 모든 사화양식의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였다. 예수의 동정녀 잉태는 하느님 아들의 출생에 합당한 기적으로 이해하였다. 1965년 3월 네덜란드에서 <새 교리서-성인들을 위한 하나의 신앙 선포>가 출판 되자 1968년 10월 15일 '교황 임명 추기경위원회'는 그 교리서의 부족한 표현을 수정하도록 지침을 시달하였다. 동정녀 잉태에 대해 그 지침서는 이렇게 말한다. "교리서는 강생하신 말씀의 거룩한 어머니께서 언제나 동정의 영예를 지니고 계셨음을 고백해야 한다. 또한 강생의 신비와 지극히 잘 부합하는 예수의 동정녀 잉태교리도 못지 않게 명시해야 한다. 이 진리를 부정하고 성서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에 반하여 단지 상징적 의미만을 보존하는-가령,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사하신 순수한 은총을 지적하는데 그치는-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가톨릭 신앙입문>, 639쪽). 동정녀 잉태 사화를 역사적 사실 보도로 알아들은 데서 발생한 동정녀 잉태 교리를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정녀 잉태의 교리는 순교자 유스티노(100-165)의 저서와 이레네오(130-200)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2세기 중반 이후의 신약성서 외경들, 특히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ilium)>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서 대단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200년경에는 사도 신경의 전신인 신앙고백문에도 삽입되었다. 4세기 라틴 교회는 마리아의 생물학적 동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리아는 출산 전에도, 출산 중에도, 출산 후에도 동정이었음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 교리는 동정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마리아가 출산 전에 동정이었음은 마태오와 루가의 잉태 사화를 근거로 정당화되지만 출산 중에도 동정이었다는 말은 <야고보 원복음서>의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원복음서>는 출산 중에도 마리아가 생물학적인 처녀성을 잃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산파를 등장시켜서 마리아의 처녀를 확인하게 한다. 출산후에도 마리아가 동정녀로 있었다는 교리는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시작하여 라틴 교회 안에 공통된 교리가 되었다. 이 교리는 마리아가 동정녀로 있기를 원했다고 가르치며, 마리아가 천사에게 한 질문(루가 1,34)을 이미 동정 선서를 한 마리아가 천사에게 항의한 말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가설이다. 루가의 텍스트 어디에서도 동정 선서에 대해 언급하는 바가 없으며, 그 시대 유대인들은 그런 종류의 선서를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그런 해석은 마리아가 한 남자에게 약혼한 몸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현대 신학적 이해]

 

동정녀가 출산하는 이야기는 영웅의 기적적 출산과 관련하여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D.A.Leeming). 이런 신화들의 공통점은 산모의 고통, 피, 후산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신화에는 인류의 염원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즉 건드리지 않는 처녀가 구현하는 순박과 정결이 그것이다. 진실한 모성, 안도, 성숙, 양순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끝으로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싹트는 희망, 한 어린아이가 뜻하는 희망과 기쁨이 모두 그 것이다"(J.Ratzinger).

 

그러나 신약성서의 동정녀 잉태 사화는 종교사적 배경에서보다 구약성서 전통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이 구약성서 언어에 젖어 있고, 마태오와 루가 두 사람의 의도도 예수의 탄생이 구약 약속의 성취임을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중요한 순간에 기적적 탄생이 있었음을 보도한다. 이사악의 어머니 사라(창세 18장). 사무엘의 어머니 안나(1사무 1장), 그리고 삼손의 어머니(판관 13장) 등은 모두 수태하지 못하는 여인들이었다. 수태와 결실이라는 인간적 희망이 없던 사람들이다. 세 여인이 모두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 줄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이루고(창세 18,14; 루가 1,37), 비천한 이들을 들어올리는(1사무 1,11; 2,7; 루가 1,48; 1,52)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결과이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기적적 탄생은 석녀인 엘리사벳(루가 1,7-25)을 걸쳐 마리아에게서 그 절정에 이른다. 사건의 의미는 모든 경우에 동일한다. 세상의 구원은 인간에게서, 인간의 힘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느님이 무상의 선물로 주는 것, 인간은 하느님이 주는 것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약 전통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간의 불임과 결부시켜 말하고 있다. "기뻐하라, 아이 못 낳는 불임의 여인아! 환성을 지르며 외쳐라, 산고를 모르는 여인아! 과연 외로운 여인의 자손들이 남편 가진 여인의 자손들보다 더 많으리라"(이사 54,1; 갈라 4,27).

 

신약성서는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의 신성을 동정녀에게서의 탄생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하느님을 아버지로, 처녀인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반신반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451년 칼체돈 공의회는 예수를 "온전한 하느님, 온전한 인간"이라고 천명하였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교리는 예수가 정상적으로 인간 결혼에서 출생하였다 할지라도 변치 않을 것이다"(J.Ratzinger).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예수의 하느님 아들 됨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예수의 잉태는 하느님의 아들이 새로 생겨났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희망을 의미한다(시편 2,7). 루가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아들'은 이 전통을 잇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 약속의 참다운 상속자 메시아이며 이스라엘과 우주 만물을 다스릴 왕이라는 것이다. 동정녀에게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말은 하느님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절망적인 인류 안에서 예수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는 인류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그 기원이 온전히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역사는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작이다. 따라서 예수는 새로운 아담(1고린 15,47)이며 그와 함께 새로운 인류가 시작된다.

 

[의의 및 평가]

 

성서가 전하는 동정녀 잉태는 하느님의 베푸심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지 동정의 수덕적, 윤리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며 인간은 그분 앞에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훌륭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동정녀'라는 단어를 생물학적 처녀의 의미로 해석하면 구약성서적 배경을 떠나 종교사적, 신화적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해하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동정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결혼하는 신부에게 요구되는 것일 뿐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 민족의 증대를 위하여 동정을 지킨다는 것은 불임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고, 이것은 큰 굴욕과 불명예로 여겼다"(<성서 신학사전>, 24쪽). 구약성서에서 동정은 인도에서와 같이 그 처녀가 속하는 집단의 순결을 상징하지도 않고, 그리스, 로마 신전의 베스탈 처녀들의 경우와 같이 종교적 특권과 결부되지도 않는다(J.W.Drijvers).

 

성서는 신앙체험을 기록한 전승이지 생물학적, 역사적 사실 보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리아 한 사람이 생물학적 처녀였다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 체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동정녀의 뜻을 생물학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예수의 강생은 독신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만 어떤 메시지가 될 수 있고 결혼 생활을 하는 절대 다수의 인류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사실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동정녀 잉태 교리의 오랜 전통이 은연 중에 독신자들의 독선적 우월감을 조장하는 데 일익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안에 독신 생활 전통이 있는 것은 마리아나 예수가 동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 고린토 전서 7장 25-38절의 바오로 사도의 권고와 마태오 복음 19장 10-12절의 복음적 권고에 바탕을 둔 특수 생활 양식으로 보아야 한다. 동정녀 잉태에 대한 마태오와 루가의 사화는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본질적인 것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무능하고 하느님은 베푸는 분이라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가치를 생산력과 동일시하는 현대 사회 안에 의미 있는 메시지라 할 것이다.

 

 

(3)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


 


1. 교의형성의 역사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무염시태)' 교의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의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에 의해 선포되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DS 2803). 이 교의는 마리아가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원죄와 그 과실에 빠져들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비록 성서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이 교의가 초대교회로부터의 긴 전승을 배경으로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초대 교부들은 성서의 몇몇 구절을 통해 마리아의 탁월한 성덕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명을 통한 마리아의 업적이 죄와 불순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스띠노는 처음으로 에와의 불순명과 마리아의 순명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마리아의 무죄성을 암시하였다. 아타나시오나 에프렘 부제도 육화의 신비와 관련하여 마리아의 완벽한 동정성과 무죄함을 표현하였다. 특히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마리아가 하느님께 동정으로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성화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깨끗해졌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교의에 힘을 더했다. 이후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를 통해서 마리아의 전적인 성성(聖性)과 무죄성에 대한 명제가 일차적으로 서방교회에서 관철되고, 오랜 발전을 거친 끝에 동방교회에서도 관철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동방교회는 7세기부터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축일을 지내오고 있다.

 

12-13세기가 되자 스콜라 철학자들은 마리아의 무원죄성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inas, 1225-1274)가 이를 부인하는 쪽이었다면, 또 다른 탁월한 신학자였던 둔스 스코투스(Duns Skotus, 1266-1308)는 이를 열렬히 옹호하는 편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교부들처럼 마리아의 완벽한 성덕과 무죄함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로부터 자유롭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적 원죄 이론을 따랐다. 그래서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면제된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적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그리스도로부터 힘입은 은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 같은 입장의 차이는 이후에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도미니코회 회원과 둔스 스코투스의 프란치스코회 회원간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15세기에 들어 비록 실재적인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무염시태가 신앙조항으로 선포 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염시태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자 식스토 4세는 회칙 "Grave nimis"를 선포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쟁을 금지시켰다. 트렌트 공의회(1545-1563)는 종교개혁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논쟁거리인 '무염시태'를 다루지 않음으로써 식스토 4세의 중립적인 노선을 따랐다. 다만 원죄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반적인 원죄 이론에 마리아는 포함시키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삽입했다. 1667년부터 1799년까지 13명의 교황들 역시 선대의 교황들의 입장을 따라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 전체의 분위기는 '무염시태'를 교의로 선포해야 한다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8세기의 비투스 쉐퍼(Vitus Scheffer)는 성모무염시태에 대한 교리가 창세기에 나타나 있음을 제시하기 위하여 일곱권이나 되는 책을 저술했다. 1830년의 '기적의 메달' 성모 발현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염시태'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여주었고, 1849년 10명의 프랑스 주교들은 공동 서한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교의 선포를 청원했다. 또한 마리아의 무염시태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어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1843년 프랑스 국가 교회의 총책임자였던 추기경 람브루스키니(lambruschini)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호의적인 성서, 전승, 교황청 문헌 등을 모두 수집하여 책으로 발간하였다. 또 예수회의 죠반니 바티스타 페론(Giovanni Battista Perrone)는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하여]라는 책을 펴내어 큰 인기를 모았다.

 

성모 신심이 뛰었난던 비오 9세가 교황이 되자 교의 선포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착수됐다. 그는 신학 자문위원회와 추기경 자문위원회를 소집하여 의견을 수렴했다. 대다수 주교들의 호의적인 의향과 추기경단의 동의를 얻은 비오 9세는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축일을 맞이하여 회칙 [Ineffabilis Deus]를 선포하였다.

 

(4) 승천하신 마리아


 


1. 교의형성의 역사

 

'성모 승천'교의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성좌의 고유한 권위에 따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모친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교의를 하느님이 계시하신 대로 공언하고 선언하며 분명히 정의하는 바이다." 이 교의의 바탕은 회칙에서 밝힌 대로 성서 '안에'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무염시태의 경우처럼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서 '안에' 있다는 것은 승천교리가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전해주는 증언에 그 교의가 전적으로 부합한다는 뜻이다.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초대 교부들의 증언은 전혀 없다. 4세기말에 가서야 에피파니오(Epiphanius of Salamis)가 마리아의 죽음에 관한 여러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교회의 전승에 따라 5세기말부터 이와 관련된 축일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6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마리아 축일의 명칭은 '하느님 어머니의 기념일(Mneme Theotokou)'이었다. 이어 황제 마우리치우스(Mauricius, 582-602)는 자신의 통치 전역의 모든 교회로 하여금 '마리아의 잠드심(Koimesis)'이라 명한 축일을 8월 15일에 지내도록 했다. 이는 나중에 '하늘에 오르심(Analephsis)'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교황 세르지오 1세(Sergius I, 687-701)는 이 축일을 서방교회의 축일표에 포함시켰다. 이때부터 축일이 되면 강론가들은 일반적으로 마리아가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제르마노, 크레타의 안드레아, 다마스커스의 요한 등의 성모 승천에 대한 강론은 매우 유명하다.

 

마리아의 '승천(Assumptio)'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8세기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니코메디아의 Giorgio,†880)는 마리아의 무죄성에 관련하여 육체의 승천을 주장했고, Teodor Studiat(†826)는 마리아가 천상에서 우리의 위대한 중재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황제 레오 4세(†912)는 Giovanni Geometra(†989)와 더불어 마리아의 육체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다른 죽은 모든 이들의 승천의 중간 상태라는 점을 암시한다. Giovanni Furnes(†12세기초)와 Michaele Glicas(1204), Gregorio Palamas(†1359), Nicola Cabasilas(†1396)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을 주신 어머니로서 예수의 육체와 유사성을 들어 승천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명-예로니모], [가명-아우구스티노], [황금전설] 등과 같은 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성모 승천 교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오랜 동안 이 교의는 특별히 논의되지 않다가 '무염시태' 교의 선포를 계기로 재조명되었다. 1869년 라벤나의 대주교는 교황 비오 9세에게 승천 교의를 선언하도록 격려하였고,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 113명도 마리아 승천 교의를 청원했다. 20세기초에 많은 국제 마리아 회의가 열려 신학적 기초를 다졌고, 전세계로부터 80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서명한 3000여건의 청원서가 교황청에 답지했다. 또한 쉐벤(M.M.Scheeben), 페쉬(Christian Pesch), 추기경 알렉시오 레피시에(Alessio Lepicier) 같은 146명의 신학자들이 성모 승천 교의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재의 교회 신앙 의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신앙의 계시적 성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예수회의 휠로그라씨(G.Filograssi)의 주장이 교의 선포에 힘을 더해 주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를 기초로 주교들, 신학자들, 그리고 신자들의 동의를 묻고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1950년 모든 성인의 축일에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했다.

 

 

(5)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공적으로 선포된 교의는 아니지만 가톨릭 교회안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 내용이기에 이를 소개한다.


 

교회의 어머니 [라] Mater ecclesiae [영] Mother of the Church (한국가톨릭 대사전, "교회의 어머니", 박문수)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아 육친의 어머니가 되듯이, 교회와는 신앙과 사랑의 모범으로 어머니가 된다고 믿는 신앙이자 마리아의 별칭.

 

교부 시대까지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는 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교부들이 동정녀로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처럼, 교회 또한 신자들의 동정 어머니라는 사실을 지적하였을 뿐이다. 중세 시대에도 몇몇 교부들이 은총이 가득하신 동정녀를 교회의 형상, 교회의 가장 탁월한 일원 그리고 교회의 사랑스러운 어머니로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그나마도 성 대 알베르토 (Albertus Magnus, 1200?-1280) 이후로는 점차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비오 10세(1903-1914)에 이르러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로 관계를 맺는다. 그는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기본적인 관계가 어머니로서 갖는 관계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은총이 가득하신 동정녀가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라는 사실로 전체 몸인 교회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교회 역시 사람들에게는 교회로부터 사람들이 초자연적 삶을 얻고 주로 성사의 수행을 통해 양육되기 때문에 어머니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다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현대 신학에서 마리아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구원의교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주제로 등장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마리아가 당신 아들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제 8장은 그리스도 및 교회의 신비와 관련시킨 동정 마리아에 관한 교리를 공식화하고 종합한 문헌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위치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렸다.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한 역할을 격하시키는 것으로인식될 위험 때문이다. 사실 그분의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나오고, 철저하게 그분의 중재에 종속되어 있다.

 

마리아가 교회와 맺는 관계에서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교회의 입장은 <교회 헌장> 제 8장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는 동정녀로 그리스도를잉태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까지(57항) 성자와 결합하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되신다고 한다. 곧 신앙의 나그네 길을 걷고 아들에 대한 일치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보존하였으며, 하느님의 섭리대로 그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거기서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 함께 바쳤으며 당신이 낳은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하신 그 말씀으로 제자의 어머니가 되시고(58항), 아울러 당신 아들이 승천한 후 기도로써 초기 교회를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59항). 이처럼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구원 사업과 성령의 활동에 전적으로 참여하여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었다. 바로 이 삶의 모습이 마리아를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도극한 지체와 전형으로 보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53, 63항). 또한 지상에서 한 역할에 못지않게 은총의 세계에서도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에 함께하여 구원 사업에 협력하신다고 본다(61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같은 내용을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관계가 예수가 제자(요한)에게 어머니를, 어머니에게 제자를 맡기신 행위(요한 19,25-27)로 확립되었다고 하면서, 주님의 뜻이, 곧 마리아의 특징인 모성적 협력이 교회의 특징이 되기를 바란다는 점을 재확인하였다.
 
내용출처 : [기타] 블로그 집필 - 한 알의 밀씨 

(출처 : '성모 마리아 소개와 4가지 교의'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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