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환자들이나 그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나의 진료실은 병원의 한쪽을 차지한 작은 방이지만 여기 앉아서 만나는 세상은 넓고도 다양하다. 여기서 바라보면 아이들이 그저 ‘티 없이 맑고 밝게’ 커가는 것만은 아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가 오면 또 그대로, 그 부침(浮沈)의 높낮이만큼이나 아이들도 고민을 하고 세상과 싸운다.
며칠 전에 중학교 2학년인 한 여자아이가 왔다. 아이는 첫눈에 보기에도 우울하고 의기소침해 보였고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너무 자신 없다”고 말했다. 아이는 공부를 곧잘 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는 늘 부족하고 성에 안 차는 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남을 배려할 줄만 알고 좀더 야무지지 못한 것에 너무 화가 난다. 더 뛰어나고 야망이 있는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창피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아이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방과 후 학원을 세 개씩 다니고 있었고 스스로 어머니의 기준에 맞는 아이인지 그렇지 못한 아이인지를 끊임없이 신경 쓰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아이가 우울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겠으나 요즘 많은 아이가 느끼는 압박감의 정체는 이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경우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놀이와 수면을 박탈 당한, 분주하고 힘겨운 일상에서 온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왜 하루 두세 개의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도 모르고, 나름대로 열심히 치른 시험 결과에 대해 기꺼운 칭찬 한 번 변변히 받아 본 적 없는 채로 열한 시까지 학원에 붙잡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공부를 한다.
뒤집어 보면 이면에는 자녀가 남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더 잘 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다수 아이들의 목표 지점으로부터 이탈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하는 부모의 불안이 있다. 설사 부모가 ‘왜 그렇게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의문을 일시에 잠재우는 가장 큰 동기는 결국 ‘다른 아이들이 다 하니까’이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하지만 옆의 아이들도 다 이 정도는 하는 걸요. 따라가지 않으면 낙오되니까요.”
사실 그런 말은 어느 정도 옳다.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택해서 걸어갈 때, 즉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거나 그 반대일 경우에 인간은 누구나 불안하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살펴보고 반추하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회의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하지만 그 ‘다름’에 대해 끊임 없이 불안해 하고 마음속에 세워 놓은 타인의 기준을 따라가느라 버거워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그런 유의 불안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 채우지 못하는 밑 빠진 그릇 같다. 아무리 쫓아가도 타인의 기준은 더 높은 곳에 이르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채워야 하는 그릇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채워도 다 차지 않았다고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이 더 문제인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 수백만원에 이르는 어린이용 동물 모형 세트가 품귀를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주변에서 누구나 아이에게 사 주니까 빚을 내서라도 사 주게 된다”는, 음성 변조를 통해 들려온 엄마의 안타까운 목소리는 그런 자신 없음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요즘 들어 타인과의 차이를 견디는 것이 결국 정신적인 건강함의 척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견디는 자신감은 자기애(自己愛),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으로부터 온다. 그렇게 자신을 존중하는 느낌을 자존감(自尊感)이라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과 현재의 자기 모습이 가까울수록 자존감이 높은 것이고 반대의 경우는 자존감이 낮은 것이다. 자긍심이 손상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비난에 대해 민감한 것을 흔히 ‘자존심이 강하다’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틀린 말이다. 정말로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남의 기준을 좇기보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며 비난에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쉽사리 자신에 대한 만족감과 존중감이 손상되지 않는다.
적절한 수준의 자기애 혹은 나르시시즘은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문제는 그것이 건강하게 발달하지 못한 경우에 생긴다. 어린 시절에 자기애를 너무 부족하게 느끼고 자랐거나 반대로 너무 과하게 충족 받으며 자란 경우 소위 ‘자기애적 성격’이 되기 쉽다. 물론 자기에 대한 사랑이 손상되었을 때 사람은 누구나 분노와 상실감,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핵심은 자존심의 손상에 대해 유난히 민감해서, 타인이 비난을 하거나 경쟁에 질 때 견딜 수 없는 열등감과 불안과 분노를 경험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주변을 돌보거나 배려하지 못하고 오직 유리 그릇같이 깨지기 쉬운 자기를 보호하는 데만 에너지를 쓰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 부모들은 그런 취약한 자기애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아이들보다 뒤지는 것, 아이가 타인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 교사로부터 자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듣는 것에 너무 아파하고, 애달파 하고, 자존심 상해 하고, 절박해 한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한 싸움터로 열심히 아이들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는 것 역시, 어쩌면 그런 손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경우 삶의 목표는 하나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그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 잠시 한 발 물러서서, 자녀의 열정과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고 남과 다른 개성을 가진 아이로 키우기보다는 그런 ‘표준적 목표’에 맞추는 것이 대체로는 앞에 있다. 목표가 하나일 때 대안적 삶의 가능성은 닫혀 버린다. 보이는 길 밖의 더 넓은 다른 세상을 볼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아마도 집단적인 병적 나르시시즘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이 시대 부모의 자존감을 그렇게 취약하게 만들었을까? 조금 느긋하고 유연한 태도로 나의 아이와 다른 아이의 능력 차이, 속도 차이, 취향과 성품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 그다지도 인색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어떤 시점에, 꼭 받았어야 하는 자기애의 만족을 받지 못하고 성장해온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지금의 부모들이 성장하던 시기에 우리 사회는 개인의 차이가 무시당하고, 성별이나 학력에 따라 귀천이 나뉘고, 모자라는 것은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모두가 나름의 색깔을 지닌 소중한 존재임이 강조되지 못했던 시절을 꽤나 오래 겪었다. 실제로 우리 부모들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거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박탈감일 것이다. 그렇게 과거에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저마다 자식들에게서 충족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문제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부모 자신이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아닐까?
사람은 사회 안에서 무리 지어 살지만 각각의 개인은 또 그 자체로 완결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타인과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는 부모들이 스스로를, 나아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조금 더 존중하고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가 뭔가 잘못 성장했기 때문에 자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커 주기를 바랄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것은 착각이다. 어려운 시절이었을지 모르지만 부모는 열심히 잘 커왔고, 또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스스로의 과거에, 그리고 아이의 현재와 미래에 조금 여유롭고 관대해지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희정/정신과 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