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06 14:16:23
살아가면서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과 물질을 가장 낭비하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나의 삶을 끊임없이 피곤하게 만드는 것, 나로 하여금 나 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기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일까?
삶을 살아갈수록 분명해지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우리 마음의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죄로 인해 부패하고 불완전한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쉬지 않고, 어디서나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상처를 받고 간직하며 살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때가 참으로 많다.
심지어 서로가 치유하며 감싸야 하는 인간관계에서조차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상처와 아픔을 받기도 한다.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고슴도치의 삶과 같다.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깊게 포옹을 하였다. 순간 두 고슴도치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다시 떨어졌다. 그러다가 너무 외로워서 지난날의 상처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다시 만났다. 역시 서로의 날카로운 침이 상대의 여리고 부드러운 맨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둘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갖가지 상처와 아픔의 덩어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고 또 그런 나 자신과 더불어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상처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원치 않는 특징이 있다.
첫째, 상처는 한 번 받으면 그것이 치유되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조금씩 자라게 된다. 마음의 상처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상담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외도를 하다가 방황에서 돌아와 성실하게 가장 역할을 하는 어느 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내는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남편의 과거를 하나도 잊지 않고 작은 의견충돌에도 계속 그 문제를 가지고 서러워하고 운다고 한다.
세월이 상처를 잊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자란다.
둘째, 상처는 우리의 자유와 기쁨을 박탈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 과거를 과거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의 행복을 경험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과거의 상처가 모든 것이 새로워진 오늘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무참히 깨뜨려 버린다. 오늘을 살면서 과거에 살도록 우리를 지배해 버린다.
어느 날 아침, 미시간호수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있던 나는 오래 전에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작은 문제가 그 날 아침에 만난 감격과 아름다움을 깨뜨리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것을 경험했다. 상처가 나를 과거에 살도록 묶어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셋째, 상처는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에 따르는 관련감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때 생기는 감정을 영어로 response(반응)라고 말한다. 그런데 상처를 건들면 단순히 response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감정이 발생하는 reaction(반작용)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반작용은 과대반응을 낳거나, 아니면 움추려들게 하거나, 무반응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사회생활을 할 때 직장상사나, 혹은 자기의 윗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넷째, 상처는 유전된다는 것이다. 우리 육체는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이다. 그런데 이 유전은 육체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에도 영적인 것에도 적용된다. 성경에서 이런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야곱의 거짓말은 자기 아들들에게도 흘러 내려가 그 아들들에 의해서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오랜 세월 슬픔으로 지내기도 했다. 나의 상처를 그대로 두면 그 상처가 나의 자녀들에게 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과 이웃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다섯째, 상처는 마음의 문제뿐 아니라 육체와 영적인 문제의 원인이 된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은 위장이나 눈에 쉽게 나타난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신경증의 증세가 나타나며,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여섯째, 상처는 마음 한 구석에 생겼다할지라도 마음판 전체를 깨뜨려 버린다. 우리의 마음을 유리에 자주 비유하는데 그것은 마음 어느 부분이든 상처를 받으면 그 부분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전체가 상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 네 명을 기르는 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잃어버리면 한 아들을 잃은 슬픔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들을 잃어버린 충격과 상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민감하고 파장이 크다는 것이다. 이 상처는 수치심과 좌절감, 그리고 모멸감 등의 감정을 수반하면서 분노를 발생시킨다. 이것이 심하면 증오와 적의를 품는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상처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상처가 상실, 계획의 좌절, 인격적인 무시나 인간관계의 갈등에서 생긴다고 한다. 상처가 상처인지 모르고 살아왔던 나였다.
그리고 이 상처가 치유 받아야 할만큼 그토록 아프고 치명적인 것인 줄 몰랐다. 단지 이 아픔의 이유를 누구한테 물어볼 수는 없을까 하는 막연한 원망이나 분노가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나의 이웃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나의 상처가 나의 이웃 속에도 가득했다.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실에도, 좌절에도, 심지어는 말 한마디에도 흔적이 남는 상처의 마음을 하나님이 왜 만드셨을까? 그리고 나보다 훨씬 더 큰 상처 덩어리를 가지고 방황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오히려 나의 상처는 별것이 아니라는 이상한 감사의 마음도 들기도 했다. 이러한 상처가 우리 인간 모두의 것이라면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문제에 왜 외면하시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나의 상처보다도 더 절박하고 처절한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불행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성장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이 없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행복한 주인공의 환경처럼 모든 것이 풍족하였다. 어디에 가든지 항상 주인공이었다. 완벽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낭만적인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삶의 시작은 아름다운 환상을 서서히 깨뜨렸다. 갈등의 연속이었다. 왜 나처럼 생각을 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만남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3-4년의 시간이 흘러서 미국에 유학하게 되었다. 공부하는 중에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를 하게 되었다.
이 훈련을 하면서 나의 마음속에 엄청난 분노와 상처가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직면하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그러나 그룹 치유를 통해서 4년 전 꾸겨서 쑤셔 넣었던 감정의 작은 박스를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의 감추어진 감정의 박스를 열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의자를 들어서 다 죽이고 싶은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나는 그 때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속에 이런 마음이 있다니….
어느 순간 오랫동안 잊혀졌던 눈물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계속 울었다. 병원에서 퇴근하고 집에 와서 며칠을 울며 지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 뒤에 마음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내 자신이 너무나 불쌍해졌고 외로움과 고독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오다 지쳐서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처음 나는 나의 이 상처가 치유 받아야 되는 것임을 인정하고 느끼기 시작했다. 온전한 나. 즉 감정을 가진 나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상처를 안고 살아온 지난날의 삶이 얼마나 허공을 헤매며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내 상처가 나를 움직여 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상처를 안고도 그렇게 잘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진정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삶 속에는 생명이 없다. 굳게 닫힌 철문만이 사람들에게 보여질 것이다. 치유는 내가 치유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산상수훈에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씀은 자신이 진정 치유 받아야 할 존재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고백할 때 복
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 복은 치유의 복이며, 성장의 복이며, 생명의 복이며, 남을 살리는 사명의 복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치유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상처에서 자유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상처의 치유를 통해서 그들의 가슴속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은 행복한 사람이다.
**김형준 교수/전 창신대 교수. 동안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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