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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하 6세의 분묘는 압해도에 있었으나 고려말 압해도가 왜구의 침탈로 실토(失土) 등이 본거지로 하였으나 고려조에 현치(縣治)로 하였다가 현이 없어지고 나주에 소속되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빼앗겼던비운의 섬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이 전남 신안군 압해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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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 尹氏/1728-1770)는 윤덕렬의 딸로 우리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일컬 어지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6세 손녀이자 詩 · 書에 두루 능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한국 회화사에 유명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유명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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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아버지 정재원(1730-1792)에게는 세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남매가 있었다. 큰아들 약현(若鉉)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南씨(1729-1752)의 소생이며, 둘째 부인 해남 윤씨 (1728-1770)에게서는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 등이 있었다. 윤씨가 세상을 뜬 다음해 김화현의 처녀 황씨를 첩으로 삼았으나 요절해버리자 1773년 다산이 12살되던 해에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어린 다산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그가 서모 김씨다. 이 분이 다산이 장가들 때까지 손수 부스럼이나 종기를 치료해주고 친어머니처럼 살뜰하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황)을 두었는데,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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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1776년 2월 22일 풍산 홍씨(豊山 洪씨 1761-1838)와 결혼하였다. 장인은 후일 무과승지 홍화보(洪和輔)이다. 홍씨 부인과 다산 사이에는 6남 3녀의 9남매가 있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하고 2남 1녀만이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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