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위령성월(慰靈聖月)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 교회는 매년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하였다. 성월(聖月)이란 전례력과는 상관없이 특정한 달에 특정한 신심을 북돋기 위해서 정해 놓은 한 달 동안의 특별 신심 기간을 의미한다. 특히 정해 놓은 법에 따라 성월에 일정한 신심행위를 바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역대 교황들이 특전을 줌으로써 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퍼졌다. 〔역 사〕 998년에 클뤼니 수도원의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Odilo)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수도자들에게 명하였다. 이것이 널리 퍼짐으로써 11월 한 달 동안 위령 기도가 많이 바쳐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11월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정해졌는데, 한국 교회 역시 이러한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 레오 13세(1878-1903) 그리고 비오 11세(1922-1939)가 위령 성월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위령 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이로써 11월은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자신의 죽음도 묵상해 보는 특별한 신심의 달이 되었다. 특히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나라들은 11월에는 낙엽이 지며 을씨년스러운 가을의 복판에 있게 된다. 또한 전례력으로도 연중 마지막 시기에 속함으로써 종말에 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미사 중에 듣게 된다. 이런 이유로 위령성월은 죽은 이를 기억하기 적합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때라고 하겠다. 〔신학적 근거〕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교회의 전통 교리가 위령 성월을 지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근거는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교리”이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주인이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도 이 공동체의 일원이며 살아 있는 이들도 이 공동체의 동일한 구성원이다.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유대감 안에서 죽음으로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성인들도 이 세상에서의 순례를 계속해야 하는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할 수 있다. 이렇게 산 이와 죽은 이의 통교가 가능하므로 위령기도는 가능하며 따라서 위령 성월도 더욱 의미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위령성월의 신학적 근거는 1245년 제1차 리용 공의회에서 선포된 “연옥(Purgatorium)에 대한 교리”이다(DS 838). 리용 공의회 이후 교회는 연옥의 존재에 관한 교의를 지속적으로 확인하였다(DS 856, 1304, 1580, 1820). 거룩하게 살다 간 성인은 죽음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서 자녀로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보통 사람들이 세례 후에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받으면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범한 죄(Peccatum)와 영벌은 사라지더라도 잠벌은 남게 되며, 이 잠벌은 보속을 통해 탕감 받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보속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치러야 할 보속이 있는데, 그 보속을 치르는 곳이 연옥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죄를 짓기도 하고, 지은 죄를 뉘우치거나 사죄 받지 못한 채 죽기도 한다. 이때 그의 영혼은 하느님 나라에 바로 들어갈 수 없으며 죄를 씻는 정화의 장소가 요청되는데, 그곳이 또한 연옥이다. 연옥 영혼들은 속죄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이러한 연옥영혼을 기도와 자선 행위와 미사 봉헌 등을 통해서 도울 수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DS 856, 1304, 1743, 1753, 1820, 1867). 따라서 위령 성월이 연옥 영혼을 위한 특별한 시기가 된다. 이외에도 중세 이후 대사(Indulgentia)에 대한 오용이 심해지면서, 연옥 영혼을 위한 여러 가지 기도와 자선 행위들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사를 얻기 위한 여러 기도와 신심 행위들이 위령성월에 많이 행해졌다. 위령성월에 바치는 기도는 위령 기도로 자주 사용되는 시편 129편과 위령 미사 기도문 중에서 발췌한 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위령성월 중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연 옥 (purgatorium = purgatory)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죽은 후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는 데에 장애되는 온갖 흠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정화과정의 상태. 예전에는 ‘단련교회’(鍛鍊 敎會) 또는 ‘단련지 교회’(鍛鍊之敎會)라고 했으며, 연옥에 있는 영혼(animae purgatorii)은 ‘연령’(煉靈)이라고 하였다. 〔가톨릭 교리 및 근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깨끗해지지 아니한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지기 위하여 죽은 후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30항). 이 정화 과정은 단죄 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연옥은 죄스런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게 되는 순간, 즉 인간이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이다. 연옥이라는 말이나 그에 관한 교리는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연옥을 직접 언급하는 성서 구절은 어디에도 없지만, 연옥에 관한 교리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명백한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유다 마카베오(기원전 165-160)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또한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정화되어 지복직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와 보속도 권고 하였다. 따라서 연옥 교리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교회가 꾸준히 실행해 온 기도의 관습과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가타리파, 발도파 등 이단자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전구와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한 루터(M. Luther, 1483-1546)는 《연옥론 철회》(Widerruf vom Fegefeuer, 1530)에서 연옥 신앙을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 피렌체 공의회(1439 ; DS 1304)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 DS 1580, 1820)에서는 연옥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표현하였다. ‘우리보다 먼저 간 이들을 위하여’ 중재기도를 계속 바쳐온 오랜 전통에 근거하여, 교회는 죄에 대한 적절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하느님을 뵙는데에 방해되는 마지막 장애를 연옥에서 씻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생존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 선행 ․ 미사 봉헌을 통하여 연옥의 ‘의인’들을 도울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1-1032항〉. 이를 위해 교회에서는 매년 11월을 세상을 떠난 이들, 즉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 성월’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있다. 〔신학적인 조명〕 연옥의 체험 인간은 부단히 정화되어야 한다. 죄스런 인간은 끊임없이 회개하고 깨끗해져야 하지만 정화는 인간의 노력으로써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회개 곧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봉이 정화를 가져온다. 현세의 삶 동안, 죽음의 순간에 또한 사후의 생명을 영위할 때에도 인간은 정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세 생활 중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정화는 장차 하느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전달됨으로써 실현될 완성과는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이 정화는 ‘의인’이 순결한 신부로서 지극히 거룩하신 신랑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결합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같은 정화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연옥이 존재한다.
심판하는 하느님을 만날 때에 인간은 정화되지만, 이 만남은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하느님과의 해후는 죄인에게 무서운 심판의 형식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느님 심판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히브 10. 31) 인간은 자신의 죄악과 무능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가운데서 압도하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야 할 것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마치 자신을 태워 삼켜 버리고 정화시키는 불 앞에 서게 되는 것처럼 전율을 느낀다. 연옥의 ‘불’은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정화의 과정 : 연옥은 거룩한 하느님과 상봉하는 비천한 인간의 만남으로 반(半)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과 해후하는 한 순간이다. 즉 완성되지 않고 사랑 속에서 성숙되지 않은 인간이 거룩하고 무한하며 사랑인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다. 연옥은 심히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그래서 정화되는 만남이다. 사후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상태인 연옥은 하나의 장소라기보다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상황이다. 그때에 하느님의 빛 속에서 우리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 존재와 삶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 우리는 지은 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야 한다. “각자의 업적은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이 (그것을) 밝혀 줄 것입니다. 실상 그날은 불로 계시될 것이고 또 각자의 업적이 어떤지는 그 불이 검증해 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가 쌓아 올린 업적이 남게 되면 그는 품삯을 받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업적이 더 없어지면 손해는 보겠지만 그 자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다만 불은 거쳐가듯 할 것입니다”(1고린 3, 13-15). 결정적 정화는 하느님이 인간과 더불어 이루어 나가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기 위하여 인간 측에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연옥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연옥은 지상 생활 안에서 시작된다. 인생살이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점진적 성숙과 완성의 과정이 있는 반면 이기심과 범죄로 인한 파멸의 길이 있다. 우리는 인생 안에서 죽을 때처럼 떠남의 순간들을 통과하며,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볼 때처럼 만남의 순간들을 거친다. 성숙과 완성을 향해 전진하는 매 순간은 죽음 안에서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정화시켜 나간다. 그 같은 결단의 순간들은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어렵다. 그 순간들은 성장이 따르는 위기의 순간이다. 성숙의 과정은 모두 고통스럽다. 죽음의 순간에 그 성숙의 과정은 절정에 달한다. 이 과정은 수난과 정화의 차원을 지니지만 해방의 차원도 지닌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고된 수고를 쏟을 때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정화하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연옥을 통과하게 된다. 인격적이고 역사적 과정인 연옥은 인간이 자기의 모순과 이기심을 하느님과 최종 만나는 순간에까지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이기심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쓸어 낼 수 있다. 그때에 우리는 결함과 과오를 보다 뚜렷이 의식함으로써 큰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 순간은 결정적 행복이 시작되는 때이다. 그 순간은 하느님의 구원하는 사랑에 의해 마련된다. 사랑은 정화시킨다. 고통은 사랑의 배면(背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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