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쁜 남자다.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머니에게 ‘3학기 만의 중퇴’라는 상처를 안겼다.
첫 딸을 낳아 준 여자는, 임신시킨 채 무참히 버렸다. 친자확인 소송에도 불구, “내 딸이 아니다”라며 버티던 그가
딸을 자식으로 인정한 것은 1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 대부분은 그를 “폭군”이라 부르며 떠났다.
남들이 공들여 만든 알짜배기 작품들 빼앗기를 밥먹듯 했다.
하지만 그만큼 세상을 열광시킨 남자는 없었다.
그가 인생의 한 막을 시작할 때마다, 그가 나락에서 ‘희망’을 발견할 때마다 세상의 역사는 새로 씌어졌다.
애플의 CEO(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50)’.
돈과 명예, 열정을 모두 한 손에 쥔 이 시대의 아이콘(Icon)이다.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폴과 클래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호기심이 많아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 약을 삼키던 말썽꾸러기 스티브는 17살 때 오리건주 리드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학비가 없어 3학기 만에 중퇴를 결정했다.
친구 방 마루에서 자고, 빈 코카콜라 병을 팔며 생계를 이었다.
학교는 그만뒀지만 “완벽하고 예술적인 서체를 배운 것과 동양철학에 심취한” 것은 대학생활에서 얻은 소득이다.
먹고살기 위해 20세 되던 해 그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부모님의 창고에서 ‘애플’을 시작했다.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불과 10년 후 4000여명의 종업원과 함께 20억달러 가치의 기업이 되었다.
그는 미국 대중의 우상이 됐다.
하지만 그의 인생 1막은 여기까지였다.
30살 때 모든 경영진이 그를 회사에서 내쫓았다.
함께 일했던 제프 래스킨은 “스티브 잡스가 있는 곳에선 항상 배신과 다툼, 편가르기가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이후 시작한 인생 2막은 모든 것과의 싸움이었다.
돈은 떨어져가고 언론은 냉혹했으며 동업자들은 등을 돌렸다.
5년 동안 ‘넥스트’와 ‘픽사’를 설립했지만,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몰렸다.
집과 자동차까지 빚으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마지막 순간, 신(神)은 그의 편에 섰다.
픽사가 만든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잇달아 만든 ‘벅스 라이프’ ‘토이스토리 2’ ‘인크레더블’ 등은 그에게 엄청난 수익과 함께 ‘성공한 영화 제작자’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붙였다.
1996년. 추락하고 있던 애플은 쫓아냈던 스티브 잡스를 ‘임시(interim)’라는 딱지를 붙여 ‘구원 투수’로 불렀다.
애플의 히피 같은 독특한 기업 문화는 잡스의 작품이었고, 어떤 CEO도 이러한 애플 직원들을 휘어잡지 못했다.
2년 후 스티브 잡스는 전문가들의 만류에도 모니터와 본체를 하나로 만든 혁신적인 디자인의 아이맥(iMac)을 내놓는다.
“최종 사용자가 편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맞아떨어졌다.
2000년 1월 샌프란시스코 모스코 컨벤션센터 맥월드 엑스포. 검정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스티브 잡스가 등장했다.
그가 “이제 임시(interim) 직함을 떼겠다”고 말하자 청중은 벌떡 일어나 “스티브! 스티브! 스티브!”를 외치기 시작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2004년 8월. 그는 췌장암에 걸려 3~6개월밖에 살지 못하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죽음을 준비하며 신변 정리를 하라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인생 3막이 열린 셈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제 컴퓨터·영화 업계에 이어 음반업계 평정에도 나섰다.
음악파일을 들을 수 있는 MP3플레이어 ‘아이포드’와 음악 파일을 돈 주고 사는 ‘아이튠 뮤직스토어’를 통해서다.
음반사들과의 협상을 통해 ‘합법적인’ 유통 경로를 마련했다.
이제 애플은 ‘물건’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서비스를 파는 곳이다.
지난 6월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을 극복한 모습으로 스탠퍼드 졸업식장에 나타나 축사를 했다.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에게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한다.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미련할 정도로 자기 길을 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화두를 던졌다.
2000년 그가 애플의 ‘임시 CEO’ 직함을 떼고 창업주이자 정식 CEO로 돌아와 무대에 섰을 때는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Imagine)’이 흘러나왔었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나를 보고 몽상가라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만 그런 건 아니랍니다)
허인영 /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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