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 영성

[스크랩] - 제1차 아빌라 영성강좌 <5> / 살라망카 가르멜수녀원과.... -홍 영희

뚜르(Tours) 2009. 6. 17. 09:09

 

 

           

           

              성녀 데레사의 계단을 타고 예수님께로(5)
                              -제1차 아빌라 영성강좌 & 순례피정을 다녀와서-
          

                                                                                홍 영희 성체 성혈의 리디아
                                                                                        서울 가르멜산의 성모 재속 가르멜회

 

                           

                 

                                                                                                                          살라망카 전경

 

 

                          

 

 

          II. 순례 여정 

         순례 다섯째 날인 8월 16일 저희는 성녀께서 1570년 7번째로 창립하신 살라망카 가르멜 수녀원(창립사 18장-19장), 살라망카 대학, 주교좌 성당,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원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창립할 당시 살라망카 맨발 가르멜 수녀원 건물로 사용하던 곳은 습기가 많고 환경이 적당하지 않아 초창기 수녀님들은 두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합니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60년대에 살라망카 시 근교에 새롭게 현대식 건물을 지어 세 번째로 이사를 해서 현재 그곳에 살고 계십니다. 저희는 먼저 성녀께서 수녀원을 처음 창립할 당시 사셨던 건물부터 들렀습니다. 그 곳은 현재 1874년에 창립된 어느 활동 수녀회의 분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성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유적지인 관계로 다른 목적으로는 사용하지는 않고 주로 성녀의 발자취를 찾는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윤 베네딕도 신부님께서 사전 예약을 해 주셔서 저희는 그곳의 책임자 수녀님으로부터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수녀원의 내정(內庭)은 성녀가 창립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잘 보존 되어 있었습니다. 건물 내부에는「성녀 데레사의 계단」이라 불리는 나무 계단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짜서 만들었다고 합니다.「성녀 데레사의 계단」! 저는 이 계단을 타고 예수님께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생」(수녀원)의 계단으로 성녀께 내려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제 생각에, 이 성녀 데레사의 계단은 가르멜 정상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비참함 안으로 내려가게 하는 계단인 것 같았습니다. 저희는 그 계단을 타고 성녀가 살라망카에 처음 도착해서 두 수녀님과 무서움 속에 첫날 밤을 보낸 방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현재 순례객들을 위해 소박하지만 경건하게 준비된 경당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윤 신부님으로부터 살라망카 수녀원 창립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는 함께 창립사 19장을 들으며 당시의 일들을 회상했습니다. 수녀님들이 도착한 날은 1570년 11월 1일 그러니까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이자 11월 2일 위령의 날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 창립을 확실히 하기 위해 어떻게든 집을 구해서 첫 미사를 봉헌해야 직성이 풀리셨던 성녀는 그곳에서 하숙하고 있던 대학생들을 주인의 도움을 빌어 내보내게 되는데, 학생들은 그런 조처에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어서 큰 소란을 피우며 수녀님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저녁,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짚을 침대 삼아 잠을 청하던 수녀님들은 혹시라도 해코지를 하기 위해 숨어있을지 모를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령의 날을 준비하는 망종까지 울려서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닌지 하는 무서움 속에 첫날밤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러저런 에피소드를 듣는 가운데 저희는 잠시 성녀가 이 집을 창립하시면서 가지셨을 회한을 돌이켜보며 주님의 사랑과 시대의 징표에 구체적으로 응답하기 위해 수녀원을 창립하고자 하셨던 성녀의 결기 서린 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곳 경당에서 각자 묵상시간을 가진 다음 나오는 길에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복도 군데군데 걸려있는 성녀의 시(詩)를 보게 되었습니다. 베네딕도 신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곳에 머무시던 어느 날 성녀는 공동체 수녀님들과 함께 휴식을 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 중 노래를 잘 부르던 예수의 이사벨이라고 하는 젊은 수련 수녀님이 「내 눈들 그대 뵙고자 달콤하고 좋으신 예수여, 내 눈들 그대 뵈옵고 이제 당장 죽고파」(Veante mis ojos dulce Jesús bueno, veante mis ojos muera yo luego)라는 시에 곡을 부친 노래를 하는 걸 들으며 하느님 사랑이 차올라 깊은 탈혼에 빠지셨다고 합니다. 연인들의 사랑을 노래하던 그 시가 바로 이곳에서 성녀와 만나 하느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노래하는 신비시(神秘詩)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성녀는 탈혼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오신 다음 주님을 향한 사랑의 기억을 억누를 길이 없어 그것을 다음과 같은 시로 토해내셨다고 합니다. 「사노라 내 안에 아니 살며, 지극히 높은 삶 살기가 원이로다. 어져 못 죽어 죽겠음을, 내 안에 아니 살며 사노라」(vivo sin vivir en mi, y tan alta vida espero, que muero porque no muero, vivo sin vivir en mi). 저희는 이 두 시의 역사를 들으며 윤 신부님으로부터 스페인어 가사와 멜로디를 배웠습니다. 그 후로 저희는 버스로 이동할 때마다 늘 그 노랫가락을 함께 부르며 주님을 향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곤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애절한 곡이던지 부를 때마다 주님을 향한 성녀의 애절함이 가슴에 베어오는 듯해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습니다. 

 

                                             

                                            *  살라망카 가르멜 수녀원 건물 정문 

                                               현재는 성 요셉의 종 수녀회 분원임 

 

그런 성녀의 애절한 기억이 담겨있던 살라망카의 첫 번째 수녀원을 나와서 저희는 이  

도시의 중심인 살라망카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살라망카 대학은 14세기에 도미니코회 신부님들에 의해 설립됐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당시 유럽 최고의 대학으로서 가톨릭 교회 신학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일단의 신학자들, 교수 신부님들을 통칭해서 교회는 그분들을 ‘살라망카 학파’라고 부르는데 이 학파는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신학자 그룹을 형성하면서 16세기 가톨릭 교회의 학문적 기둥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필두로 독일, 스위스, 프랑스에서 연이어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가 위기에 처하자 로마 교황청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4년)를 소집해서 종교개혁으로 인해 일어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교회의 자체 개혁을 시작하게 됐는데, 당시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 가운데 약 70명의 신학자와 주교들이 바로 이 살라망카 학파에 속한 분들이셨다고 합니다. 살라망카 학파가 지향하는 주요 신학적 흐름은 13세기에 신학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살라망카 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은 대부분이 토마스 성인의 철학, 신학을 심화하며 이를 바탕으로 강의와 사목, 영성지도를 했던 분들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 공부하신 곳 역시 바로 살라망카 학파가 가장 큰 위세를 떨치던 16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토마스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탄탄한 바탕을 갖고 계셨으며 그러한 가르침이 사부님의 작품 곳곳에 배어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성녀의 절친한 벗이자 영적지도 신부요 고해사제였던 도밍고 바녜즈(Domingo Bañez) 신부님 역시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하신 당대의 신학자셨다고 합니다. 이곳을 방문하며 윤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는,

 

                                 

                                    성녀의 작품 전집을 1588년 살라망카에서 처음으로 

                                    출간한 루이스_데 레온 신부님의 동상 

                                                                    (살라망카대학 입구) 

 

 당시 살라망카 학파를 이끌던 양대 신학자 그룹이 있었는데 첫 번째 그룹으로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이 있었고 그 다음 그룹을 형성한 신학자들이 바로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님들이셨다고 합니다. 저희 수도회가 학문적으로도 탄탄한 바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교회 내 학문의 중심지에서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저희는 이 살라망카 대학 방문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큰 감동이었던지 그리고 저희 수도회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모릅니다. 그런 학자 신부님들의 숨결이 깊이 배어 있는 살라망카 대학을 뒤로 하고 저희는 당시 도미니코회 신부님들이 사셨던 수도원인 성 스테파노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일개 수도원과 수도원 부속 성당임에도 그 규모가 웬만한 도시의 주교좌 성당만큼이나 웅장하고 예술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도미니코회 신부님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 지를 실감케 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성녀께서 살라망카에 머무실 때 그 성당의 도미니코회 신부님들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가시던 곳이 잘 보존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당의 정면 앞마당 한켠에는 살라망카 학파의 창시자로 존경받는 15세기 말 도미니코회의 학자 사제이자 살라망카 대학 교수 신부님이셨던 프란치스코 데 빅토리아 신부님의 동상이 저희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살라망카 대학 전경 성 스테파노 성당 

                             

                                         살라망카 학파를 주도한 도미니코회원들이 거주한_수도원 

 

성 스테파노 성당을 뒤로 하고 저희는 주교좌 성당 앞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근교에 있는 살라망카 가르멜 수녀원을 방문했습니다. 저희는 수녀님들의 배려로 봉쇄 안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원장 수녀님께서 수녀원 내에 있는 강의실에서 사부님, 사모님과 관련된 수녀원의 모든 보물을 갖고 나와 저희들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또 만질 수 있는 기회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성녀의 제자 수녀님이 베껴 쓰신 ????완덕의 길???? 필사본 이었습니다. 그 필사본은 똘레도 가르멜 수녀원과 마드리드 가르멜 수녀원에 있는 두 개의 필사본과 함께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 ????완덕의 길???? 복사본으로서 제자 수녀가 베껴 쓴 다음 성녀께서 직접 수정하고 다듬은 책이라 하십니다. 또한 저희는 성녀의 친필 편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녀께서 당신 딸들이신 가르멜 수녀님들을 위해 각 수녀원에 남겨주신 편지들이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 476통에 이른다고 합니다. 스페인 전역에는 유서 깊은 가르멜 수녀원마다 성녀께서 남겨주신 유물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는 성녀께서 돌아가신 후 흐르는 세월에도 변함없이 각 가르멜 수녀원들이 창립자이신 성녀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분의 정신을 잘 기릴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고 합니다. 이 곳 살라망카 수녀원에도 데레사 성녀의 작품 필사본 뿐 아니라 여러 통의 친필 편지 그리고 성녀께서 알바 데 또르메스 수녀원에서 돌아가신 후 그분의 시신을 처음으로 안치했던 관, 성녀께서 일생동안 사용하셨던 하얀 만또 등이 잘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만또는 성녀께서 살아생전에 당신의 사랑하는 딸이자 제자인 예수의 안나 수녀님에게 주신 것을 안나 수녀님께서 불란서 가르멜과 벨기에 가르멜을 창립하고 난 후 벨기에에 계시면서 이 곳 살라망카 수녀원으로 친히 보내주신 것이라 합니다. 원장 수녀님께서는 뜻밖에도 저희 각자에게 이 소중한 만또를 걸치고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감격에 겨워 차례차례로 얇은 비닐에

싸여 있는 이 만또를 어깨에 걸치고 기도도 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 살라망카 수녀원 응접실에서 유물 관람 

* 1588년에 출간된 성녀의 작품 전집 제1판본을 소개해주시는 원장수녀님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저희 일행 중 가장 연장자(75세)이신 자매님께서 성녀의 만또에 당신 뺨을 대시고 너무나 감격스러워하자 원장 수녀님께서 입어보라고 허락을 하신 것이 저희 모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된 것이라 합니다. 그 자매님께서는 오래 전에 종신서약을 하셨지만 가르멜의 카리스마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고 회원으로서의 자격도 부족하다고 하시며 월 모임 때 스카플라만 입고 만또는 걸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께 “이제는 만또를 입으셔도 되니 돌아가시면 꼭 입으세요! 사모 데레사 성녀께서 당신 만또를 허락하셨으니까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맞다고 하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자매님께서는 허리 수술을 받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순례 중에는 뒤쳐질세라 늘 앞서 걸으시는 등, 이번 순례에서 젊은 저희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오신 터였습니다. 

 

 

  

            수녀원 봉쇄 내부의 강의실에서 사모님의 유물들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난 후 저희는 수녀님들의 안내에 따라 면회실로 가서 그곳 공동체 수녀님들 모두를 면회할 수 있는 은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온 저희들을 어찌나 한 가족처럼 따스하게 맞이해주고 격려해 주셨던지 1시간의 면회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게 정말이지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나갔습니다. 윤 베네딕도 신부님께서 동시통역을 해 주셔서 저희는 수녀님들과 서로의 삶에 대해 묻고 격려도 해 주고 서로 기도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무척이나 화기애애한 시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저희 일행 중 한 자매님이 즉석에서 아름다운 한국 민요와 고전 춤을 보여주어서 수녀님들께 저희의 전통 문화를 보여준 좋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수녀님들께서 준비해주신 간식으로 나머지 오후 일정에 필요한 원기를 회복하고 마지막으로 수녀님들께서 초대해 주셔서 저희는 나오는 길에 수녀원 대성당에서 제대를 중심으로 수녀님들과 함께 둘러서서 살베 레지나를 불렀습니다. 수녀님들은 저희와 함께 한다는 표시로 제대 뒤편에 있는 봉쇄 대문을 활짝 열어 저희를 맞이하며 저희와 함께 촛불을 들고 성모님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 가락이 어찌나 맑고 고운 울림을 주던지, 그 「소리 있는 고요」에 저희 일행 중 많은 이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감격의 살라망카 순례를 마감하며 성녀의 고향인 아빌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 Ave Maria - Celtic Woman

 

 

 

 

 

 

 

 

 

 

 

 

 

 

 

 

 

 

 

 

출처 : 서울 가르멜산 성모 재속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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