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녀 데레사의 계단을 타고 예수님께로(7)
- 제1차 아빌라 영성강좌 & 순례피정을 다녀와서 -
홍 영희/성체 성혈의 리디아 서울 가르멜산의 성모 재속 가르멜회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카를로스 1세는 본격적인 의미의 스페인의 황금시기를 시작한 분으로 그분 당시의 스페인 영토는 이태리 중부 이남 전체와 북부의 밀라노 지역을 포함해 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전체, 오스트리아, 헝가리까지 이르렀습니다. 특히 카를로스 1세는 독일 제후들에 의해 독일의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독일도 그분의 통치하에 있었다고 합니다. 명실 공히 유럽의 최강 제국이었던 셈이지요. 그분의 통치가 1516년부터 시작됐다고 하는데, 윤 베네딕도 신부님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것 중의 하나는 루터가 독일 북부의 비텐베르그라는 도시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이 1517년이라고 합니다.
에스꼬리알 왕궁
성녀 데레사께서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고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하신 근본 동기 가운데 하나가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가톨릭 교회에 영적인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이었다면, 이는 카를로스 1세 왕의 통치 시절에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후에 지속적으로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칼빈, 츠빙클리 등)이라고 하는 역사적 배경과 깊은 연관을 갖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성녀가 살던 시절에 큰 획을 그었던 역사적 사건이라 한다면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이태리 북부의 트렌토에서 열렸던 트렌트 공의회라고 합니다. 그 공의회는 수십 년간의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인해 피폐된 유럽의 교회를 재정비하고 개혁하는 아주 중요한 공의회로서 거기서 결정된 주요 가르침은 1963년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약 400년 동안 전 세계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저희의 조부모님, 부모님께서 영세를 받으실 때 열심히 공부하며 외우셔야 했던 교리문답도 트렌토 공의회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합니다. 에스코리알 왕궁을 방문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성녀 데레사께서 직접 쓰신 2개의 작품 원본이 왕궁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창립사와 완덕의 길 에스꼬리알 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녀는 완덕의 길의 길을 2번 집필하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쓰신 것이 완덕의 길 에스꼬리알 본으로 이 책에는 성녀께서 당시 체험하신 깊은 신비체험들이 가감 없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고, 또 안티페미니즘이 팽배해있던 당시에 여성으로서의 품위, 기도생활에 있어서 여성이 누려야 할 권리 등에 대한 성녀의 소신 있는 견해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런 내용들이 당시 스페인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종교 재판소의 검열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왕궁 도서관
실제로 이 점을 우려한 성녀의 영적 지도자이자 고해신부였던 도밍고 바녜즈 신부님께서는 성녀에게 완덕의 길을 수정하도록 요구하셨고 이에 성녀는 2-3년간 신부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을 삭제 또는 수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완덕의 길 제2판본인 발랴돌리드 본입니다. 수정된 판본을 발랴돌리드 본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발랴돌리드 가르멜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며, 수정되기 이전에 쓰인 제1판본을 에스꼬리알 본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에스꼬리알 왕궁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에스꼬리알 순례에서도 안내를 맡아 많은 설명을 해 주신 윤 베네딕도 신부님은 어떻게 해서 완덕의 길과 창립사 원본이 에스꼬리알에 오게 됐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1500년대 후반 스페인을 통치하던 필립 2세는 신대륙에서 수송되어 온 엄청난 양의 금,은을 바탕으로 스페인을 유럽의 최강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복 전쟁을 벌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한 많은 건물을 짓는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어진 건물 중에 하나가 바로 에스꼬리알에 있는 왕궁인데 필립 2세는 여러 예술가들을 불러다가 수많은 작품을 만들게 해서 왕궁 내부를 장식했다고 합니다. 에스꼬리알 왕궁에 그 유명한 엘 그레꼬의 작품이 많이 걸려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엘 그레꼬는 그리스 사람으로 젊어서 르네상스적 화풍을 배우기 위해 이태리의 베네치아 공국에 가서 유학을 했답니다. 그 후 스페인에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왕실로부터 왕궁의 궁정 화가로 초대 받아 에스꼬리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하게 여긴 필립 2세는 그에게 그림을 그려 보라 했다 합니다.
그러나 그의 화풍은 당대의 화풍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라 그의 그림을 탐탁지 않게 여긴 왕은 그를 내쫓고 말았다 합니다. 이에 엘 그레꼬는 똘레도로 가서 죽기까지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셨다지요. 어쨌든 필립 2세는 왕궁을 갖가지 예술품으로 장식했으며 도서관을 신설해서 스페인 내외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당대의 신학, 철학, 문학 작품의 원본을 수집했다고 합니다. 필립 2세에게는 누이가 한 분 있었는데, 그러한 오빠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공주는 당시 종교 재판소의 검열에 회부된 채 계류되어 십 수 년 동안 종교 재판소 보관소에 숨어 있던 완덕의 길 제1판본을 빼내어 왕에게 선물을 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이 책은 서슬 퍼렇던 종교 재판소의 검열 하에서도 왕의 보호 아래 살아 있을 수 있었고 400년 간 국가의 보물 중에 하나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창립사는 그와는 조금은 다른 경로를 거쳐 그곳에 맡겨지게 됐다 합니다.
원 가르멜과 맨발 가르멜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는 와중에 성녀가 할 수 있던 마지막 일은 당시 왕인 필립 2세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하지요. 3통의 편지를 쓰셨는데, 이 편지를 받은 왕은 맨발 가르멜을 없애려 했던 원 가르멜 소속 신부들과 그들 편에 있던 교황 대사의 영향을 차단하셨다 합니다. 그 후로 일이 잘 풀리면서 결국 맨발 가르멜은 원 가르멜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되어 하나의 새로운 카리스마를 갖는 수도회로 정식 창립이 되었다 합니다. 필립 2세가 아니었다면 저희 수도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겠지요. 왕에게 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초창기 저희 수도회 수사, 수녀님들께서는 매일 기도할 때 스페인의 왕을 위한 기도를 꼭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대 총장이신 도리아 신부님께서는 수도회의 이름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창립사 원본을 왕에게 선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책이 에스꼬리알 왕립 도서관에 오게 된 것입니다.
망자의 계곡
저희는 왕궁을 방문한 후 오후에 왕궁 근처에 차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망자의 계곡’을 들렀습니다. 그곳에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때 돌아가신 전몰장병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 근대화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스페인은 큰 홍역을 앓았다고 합니다. 귀족, 부자 등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과 농민, 광부, 노동자 등으로 대변되는 소외 계층 사이의 대립이 그것이었는데, 소외 계층 사람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이를 조직화해서 정치적인 승리를 얻고 나라를 공산화해갔다고 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왕실을 비롯해 귀족, 부자 계층에서는 당시 아프리카의 식민지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던 프랑코 장군을 수장으로 해서 공산주의자들을 대항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스페인 내전이라 합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영화 가운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영화가 바로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지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된 이 전쟁에서 프랑코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가 결국에는 승리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왕실과 정부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고 총통의 자리에 올라 1975년 죽을 때까지 근 40년을 철권 정치를 하며 독재 정권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페인에 이민 온 한국 교포들 사이에서는 프랑크 총통을 스페인의 박 대통령이라 부른답니다.
독재정권을 유지하며 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핍박하며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한 가지 프랑크 총통이 잘 한 일이라면, 내전이 종식된 후 전쟁에서 죽은 장병들, 시민들의 시신을 모두 거둬들여 같은 묘소에 안치한 일입니다. 우파, 좌파 할 것 없이 싸우다 죽은 사람들 모두가 스페인의 아들들이라 하여 죽어서나마 한 자리에 묻혀서 위로를 받으라고 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독재자이긴 했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그 나라의 국부(國父)로서의 그릇은 됐던 분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몰장병들의 시신을 안치한 성당은 빼어난 절경으로 둘러싸인 명당에 있는 조그마한 산을 깎아서 그 내부에 지은 것입니다. 내부 규모가 엄청난데다 돌아가신 분들을 지키는 대천사들의 웅장한 상들이며 그림들, 조명들이 엄숙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들어서는 모든 이들에게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했습니다.
장병들의 시신은 중앙 제대 좌우에 있는 조그마한 두 개의 경당 내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 두 곳을 모두 방문하면서 윤 베네딕도 신부님의 제안으로 그곳에 안치되어 있는 분들 뿐 아니라, 6.25 동란 때 돌아가신 남·북한의 모든 희생자들, 분단된 조국, 특히 북한의 교회를 위해 다 함께 기도했습니다. 후일 성지 순례를 끝내고 여러 재속회원들께서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에스꼬리알에서 방문한 망자의 계곡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늘 마음 한켠에 남아 가슴을 저미게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분단된 조국의 아픈 현실, 통일에 대한 염원, 북한에도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저희들의 간절한 마음이 건드려졌던가 봅니다. *
|
|
트리엔트 공의회 | |||
|
'가르멜 영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 제1차 아빌라 영성강좌 <5> / 살라망카 가르멜수녀원과.... -홍 영희 (0) | 2009.06.17 |
---|---|
[스크랩] - 제1차 아빌라 영성강좌 <6> / 부르고스 가르멜수녀원과.... -홍 영희 (0) | 2009.06.17 |
[스크랩] [ 가르멜의 영성1 ] (0) | 2006.03.05 |
[스크랩] [ 가르멜의 영성2 ] (0) | 2006.03.05 |
[스크랩] [ 가르멜의 영성3 ] (0) | 2006.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