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샘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믿음의 눈으로」

뚜르(Tours) 2009. 8. 26. 14:26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나는 교사다. 하느님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서 나는 대개 세 가지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인간이 하느님에 관해서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 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느님은 화를 내시는가?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는가? 그리고 여러분이나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좀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단호하고 절대적으로 "아니오"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은 화를 내시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하느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있다. 따라서 하느님이 정말로 한 번이라도 화가 나셨다면, 그분은 영원히, 그리고 항상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분노이시다." 우리는 성서가, '하느님의 분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성서학자들은, 그것은 화법의 비유적 표현으로, 인간의 성질을 하느님에게 투영한 의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성 요한은 쓰고 있다. 또 우리는 감정적인 반응이 부어진 자극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수많은 방법으로 반응할 수가 있다. 나는 화를 낼 수도 있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미안한 느낌까지 가질 수가 있다. 그것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으며, 내 안에 있는 것에 달려 있다. 다른 행동에 따라서 심하게 동요를 느낀다면, 나는 내 행복을 그 사람의 손에 맡길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지배하는 힘도 줄 수가 있다.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의 약점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느님은 스스로의 힘을 우리에게 넘겨 주고 자신의 행복을 우리 손에 쥐어 줄 것이다. 베드로는 언젠가 예수님께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베드로가 일곱 번을 제의했더니, 예수님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을 곱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자비에 제한을 두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되풀이해서 모든 사람을, 특히 우리에게 죄 를 지은 사람들을 사랑하야 한다 고 말씀하신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이 화를 내 시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학자들이 옳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지금까지 하신 것은 모두 사랑이시다. 이제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자.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는가? 내 대답은 역시 "아니오"이다. 이것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면서 나는 간단히 이렇게 물었다. "내 가 이 과목을 아주 잘 가르치고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도움을 주었다고 가정합시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원하 고 있으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나에게 협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은 필요한 보고서도 써 내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낙제했다는 것을 기록하면, 내가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까, 여러분이 내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벌 준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성적을 기록한 것뿐입니까?" 학생들은 언제나 나는 자신들의 성적을 기록할 뿐이라는 데 동의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슬픔을 느낄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묻고 싶다. "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여러분은 내가 좋아하는 유추를 생각해 낼 것이다. 하느님은 태양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태양은 빛날 뿐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에 서서 그 따스함과 빛의 선물을 공유할 수도 있고 그것을 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태양은 그곳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 양을 떠나 왔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변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하실 뿐이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따스함과 빛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어두워지고 추워지고 심지어는 영적인 죽음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자유 이며, 설사 그 어둠 속에서 웃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하느님의 사랑의 따스한 빛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좀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하느님은 나를 더 많이 사랑할까? 하느님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너를 더 많이 사랑할 수가 없다. 나는 너에게 내 사랑 전부를 주어 왔다. 모든 참다운 사랑이 그런 것처럼, 나의 사랑은 하나의 선물이다.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너의 자유다. 어머니가 뱃속에 있는 자식을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내 세 가지 대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하느님은 화를 내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성적을 기록할 뿐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를 더 사랑할 수는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우리에게 이미 자신의 사랑을 전부 주었 으니까. 나는 진심으로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라고 믿고 있다. 태초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믿음의 눈으로」 존 파웰 지음 / 정성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