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거리를 극복하라
언젠가 나는 많은 청중들을 상대로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하여 강론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 강론의 주제는 "걱정은 무신론의 온건한 형태이다."
라는 것이었다.
"죽음은 궁극적인 걱정거리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나는 말했다.
누군가가 "이제는 걱정하지 말게…." 하고 여러분에게 상투적인 말을 늘어
놓았다고 해서 그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나도 항상 그런 말에는 이렇게
대꾸해 주고 싶다.
"걱정거리가 수도꼭지 같은 것이라면 나도 그것을 잠가 버리고 싶다.
그러나 내 마음에 대해서 그런 통제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전혀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희의 필요를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 마지막 말씀을 조심해서 들어 보라.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소한 일에 정력과 열의를 쏟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누가 너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충분히
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온 힘을 하느님의 나라에 쏟는다면 너희의 모든
걱정들을 풀어 줄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승화'라고 부른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느님의 나라로 돌리고, 그 조그만 걱정거리들을
무시해 버리라. 힘차게 일어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도와라.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믿어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는 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성서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적인 메시지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은 두 손을 우리에게 뻗히
고서 모두 함께 오라고, 가족의 일원으로 자기에게 오라고 요구하신다.
이 초대는 우리 개개인에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두 함께 오라고 초청을 받은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수평과 수직의 두 차원을 갖고 있다.
나는 수평적 차원에서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나의 형제 자매여, 나는
여러분을 사랑한다." 고 말하지 않는 한, 하느님의 얼굴을 올려다 보면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말할 수가 없다.
여러분은 시인 샤를 페기의 말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우리는 혼자 하느님께 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형제와 자매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너는 혼자서 여기에
오지는 않았겠지?'"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쪽에서 보면 이것은 우리에게 당신에게 오라는 초대이고,
가족의 일원이 되어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자는 초대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그 믿음은 결코 쉽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
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해 왔고, 나와 함께하기를 원해 왔다. 영원
으로부터 나는 너를 알아왔으며, 너를 사랑해 왔다. 그렇다. 너는
항상 내 마음과 가슴의 일부분이었다. 나는 너 없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너 없는 세상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내가 사랑
할 수 있도록 변할 필요는 없다. 너는 다만 내가 얼마만큼 너를 사랑하
는지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너는 변화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제일의 관심사로 만드는 것은 나의 모든 정력을 사랑의
행위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다시는 충만히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언제나 미래에 나를 충만하게 채워 줄
것이다. 지금부터는 한 가지 질문만 던지면 된다.
"하느님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다가오게 하려면,
사랑의 존재로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떤 존재가 되고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믿음의 눈으로」
존 파웰 지음 / 정성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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