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9)

뚜르(Tours) 2009. 9. 2. 12:14

일본의 한 소아보건학자는 아이를 업어 기르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인디언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 특유의 스킨십을 자랑하면서 아이들을 떼놓고 기르는 서양문화와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이를 업는 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인들이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본은 아이를 <온부히모>라고 부르는 띠로 <매고> 한국은 포대기로 <두르는> 그 차이밖에 없다(아이를 업을 때 조여 <매는 것>과 느슨하게 <두르는 것>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기저귀를 논하는 자리에서 밝힌 바 있다).

서양 사람들은 아이들을 낳자마자 요람이나 아기 침대에 떼내어 따로 키운다.
이동할 때에도 유모차에 태워 끌고 다니기 때문에 모자의 스킨십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대신 아이들은 일찍부터 독립된 한 인격체로서 성장하게 된다.
업은 사람의 뒤통수만 보이는 문화가 아니라 눈과 눈을 서로 마주 보는 소통력의 문화다.

문제는 업는 문화는 스킨십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를 업으면 두 손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부엌일바깥일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업은 것조차 모르는 일체감이다.
포대기가 바로 요람이요 유모차이기에 애들은 어머니와 떨어질 걱정 없이 온종일 업혀 다닌다.

어깨너머로 요리하는 것, 세탁하는 것, 바느질하고 청소하는 어머니의 가사와 집안 구석구석을 다 구경한다.
나들이를 갈 때면 바깥 풍경은 물론이고 동네 아줌마의 얼굴과 목소리도 익힌다.
서양 애들이 요람에 누워서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 애들은 엄마의 등에 업혀 세상을 보고 듣는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미리 느끼고 배우는 현장 학습이다.

새 소리를 듣고, 꽃을 보고, 바람을 타고 오는 모든 생활의 냄새를 어머니의 땀내와 함께 맡는다.
캥거루 같은 유대류보다도 더 밀착된 상태에서 발육하는 아이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어깨너머 세상은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원리>를 <업고 업히는 상생원리>로 바꿔놓는다.
한국의 어머니들도 서양 사람들처럼 아이들을 <베이비 슬링(baby sling)>으로 묶어 매달고 다니는 세상인데도
업는 문화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그대로 따라다닌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그 흔한 키스 신보다는 업어 주는 연기가 최고의 애정표현으로 꼽힌다.
이도령이 춘향이를 업어 주는 판소리 장면과 시차가 없다.
남녀의 경우라면 에로티시즘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국민 소설이 되어 버린 <메밀꽃 필 무렵>의 라스트 신을 보라.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얻은 동이의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너는 허 생원의 그 행복 절정의 장면 말이다.

늙으신 어머니를 업고 너무나도 가벼워진 몸무게에 서너 발짝도 걷지 못했다는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노래에는 국경 없는 감동이 있다.

업고 업히는 문화는 개인 중심의 서구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인(동아시아) 특유의 집단 귀속의식으로 발전한다. 윷놀이에서 말판 쓰는 것을 보면 상대방 말은 가차없이 잡아먹으면서도 자기 말들은 넉동산을 한꺼번에 업어 나간다.
그것이 윷놀이의 최고 전략이요 진미다.

업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업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잘 쓰는 <어깨너머로 배운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업어 주고 업히는 문화를 숫자로 나타내면 어떤 수학공식에도 없는 1+1=1이 생겨난다.
<누이의 어깨너머로 수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는 아름다운 시 세계가 열린다.
아무리 추악한 세상이라도 따뜻한 체온이 흐른다.
하지만 내가 처음 홀로 일어서던 날 <따로~따로~따로>라고 추임새를 듣던 <따로의 정신>을 잃으면,
그 개별성과 그 독립정신을 키우지 않으면 <업는 문화>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자아는 의존주의로 빠지고 어깨너머로 본 풍경들은 부정확한 미신이 되고 만다.
공동체의 동질성은 넉동산을 함께 업어 나가는 연고주의와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