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샘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뚜르(Tours) 2009. 9. 29. 10:14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창세 2,17) 하느님께서 진흙에 입김 곧 생명을 불어넣으시어 창조하신 사람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궁금증을 볼러 일으킨다. 사람이라면, 아니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선과 악을 잘 알아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할 텐데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안다'는 말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 '안다'는 것은 일상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에서 인식하는 것, 예컨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선은 좋은 일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차원의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말은 일상적인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상호간의 깊고 내밀한 관계 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야훼 하느님께서 뭇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일을 두고 '너희만을 알아 골라내었다'(아모 3,2)라고 말씀하신 적 이 있는데, 이 말씀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모든 민족의 사정을 속속 들이 헤아리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아신다고 할 때는 계약을 통해 백성으로 삼으신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마치 신앙생활을 잘 하는 어떤 사람이 모든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그 중 한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이스라엘 선택, 남자와 여자의 혼인과 같이 상호간의 독특 한 관계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배타적 권리나 지배력이 형성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여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아는 분은 창조주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그분만이 세상의 참된 질서와 모든 창조물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인간 또는 집단이 다른 사람들 위에 선과 악을 나는 존재로 자처하고 그 사회가 해야 하거나 피해야 할 일을 독점적으로 지배 하고자 할 때, 그것은 창조질서를 거스르며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독재자들은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제시한 선과 악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건과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계획이나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명백히 선과 악을 아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성서는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최선의 것, 곧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그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을 때 그것을 성서적으로 '선과 악을 아는' 태도라고 한다. 이런 예를 히틀러나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우리나라 독재정권에서도 보고 겪어왔다. 이와 유사한 태도는 우리 삶 가운데서도 일어날 수 있다. 가정 또는 그와 같은 공동체의 특성은 바오로의 가르침대로 한 몸과 한 생명 을 이루는 지체들의 모임이다.(1코린 12장) 여기서 각 지체의 고유 역할이 있고, 그로 인해 공동체에 유익한 견해를 갖게 된다. 최종 견해는 하나일 수 있으며 반드시 지체들의 견해를 종합할 필요는 없다. 각 지체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으로도 이미 공동체는 살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동체를 죽이는 것은 우상숭배같이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한 의지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실제로 생명을 부여해 주는 지체 들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구조의 문제다. 그래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 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는 식의 분위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지체들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방해를 받게 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슬그머니 선과 악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의 자리를 자기도 모르게 넘보는 일을 하게 된다. 선과 악에 대해 모르실 리 없는 예수께서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라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왜 나를 선하다고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 시다"라고 대답하신 장면(마르 10, 17-18)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사실 때 그분은 철저히 인간이셨으며, 가장 대표적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이 선과 악에 대해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선과 악을 아는 사람으로 자처 하거나 그 자리를 탐할 것인가? 성서묵상 모세오경「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에서 김종수 신부 지음 / 바오로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