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暴君) 네로(Nero)의 월계관(月桂冠)
로마 제국의 제 5대 황제인 폭군(暴君) 네로(Nero, AD 54-68 재위)는 클라디우스 황제의 의붓 아들이자 후계자 였습니다. 방탕하고 사치스러우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로마 시를 불태우고 불타는 로마 시를 바라보며 시(詩)를 읊은 것으로 악명(惡名) 높습니다. 그의 친아버지는 AD 40년 경에 죽었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삼촌인 클라디우스 황제의 아내가 되어 황제의 친 아들을 제쳐두고 자기 아들 네로를 후계자(後繼者)로 삼도록 황제를 설득(說得)했으며, 황제의 딸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겼습니다. 그 녀는 네로를 권좌(權座)에 앉히기 위하여 끊임없이 음모(陰謀)를 꾸몄고, AD 54 년에는 황제마저 독살(毒殺)한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가 죽자마자 그 녀는 자기 편인 근위대장(近衛隊長) 부루스를 통해 네로를 황제로 선포(宣布)했습니다. 원로원(元老院)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으며, 로마 제국 역사상(歷史上)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 17세도 채 안된 소년(少年)에게 절대권(絶對權)이 넘어갔습니다. 아그라피나는 아들인 네로가 즉위하자 제국(帝國)을 직접 다스리는 섭정(攝政)을 펼치려 하였으나, 네로의 스승인 철학자(哲學者)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가 그녀의 영향력(影響力)안으로 들기를 원치 않고 네로에게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독자적(獨自的)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고 결국(結局) 모자관계(母子關係)는 소원(疎遠)해 졌습니다. 56 년 아그라피나는 은퇴(隱退)했고 그 때부터 62 년까지 사실상 부루스와 세네카가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네로의 성장배경(成長背景)이 이러했기에 황제로 즉위(卽位)할 때부터 비정상적(非正常的)인 행동(行動)을 보였을 수도 있었지만, 집권 전반기(執權 前半期)에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네로 정부(政府)는 경기장(競技場)에서 살육(殺戮)하는 시합을 금지시키고 검투경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시, 연극, 운동경기 등의 경연대회(競演大會)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또 세금(稅金)을 내리고, 사형(死刑)을 금하고,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待遇)를 받은 노예들이 민사소송(民事訴訟)을 제기(提起)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습니다. 네로 개인(個人)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評價)도 59년 이전까지는 훌륭한 외모(外貌)를 갖춘 미남(美男)이며 부드럽고 나약(懦弱)하지만 침착하지는 못한 성격의 소유자(所有者)라고 묘사(描寫)했습니다. 네로의 야만적(野蠻的)인 성격과 행동은 59년 어머니 아그라피나를 살해(殺害)했을 때부터 62년 6월 아내 옥타비아를 죽였을 때까지 35개월 동안에 극명(克明)하게 드러났습니다. 일찍이 56년부터 네로가 밤에 로마 시내에서 난동(亂動)을 부린다는 소문(所聞)이 떠 돌기도 하였지만 부루스와 세네카는 자기들이 직접 로마를 다스리기 위하여 무절제(無節制)하게 흥청망청 취미와 향락을 즐기도록 네로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네로는 자기(自己)가 원하는 것은 질책(叱責)이나 징벌(懲罰)을 받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과도(過度)한 예술적(藝術的) 자만(自慢)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시인(詩人)이며 전차 기수(戰車 騎手)이자 수금 연주자(竪琴 演奏者)라고 자부(自負)했으며 59
년 부터는 대중공연(大衆公演)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그는 연극배우로서 연극무대(演劇舞臺)에도 등장했으며, 극장(劇場) 측은 그가 갖가지 배역(配役)을 맡을 수 있도록 배려(配慮)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런 그의 기괴(奇怪)한 행위를 품위(品位)없고 범절(凡節)에 어긋난 수치스런 행동으로보았습니다. 63년 경부터는 이상한 종교적 열성(宗敎的 熱誠)을 보이기 시작해 새로운 종파(宗派)의 설교자(說敎者)들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었고, 62년 부루스가 죽고 세네카는 네로에 대한 자기의 영향력(影響力)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은퇴(隱退)했습니다. 64년 로마를 휩쓸었던 대화재(大火災)로 그간의 네로에 대한 나쁜 평판(評判)이 드러났습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 네로는 로마에서 56Km 떨어진 안티움 별장에 있었기 때문에 화재에 책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로마 사람들은 네로가 자신의 심미적 취향(審美的 趣向)에 맞게 로마를 다시 지으려고 직접 불을 냈다고 오해했습니다. 심지어(甚至於)는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즉흥시(卽興詩)를 읊었다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습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네로는 화재로 파괴된 로마를 그리스 식으로 재건(再建)했으며, 로마 시 전체의 1/3 크기인 궁전 '황금저택'을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完成)하지는 못했습니다. 네로는 국민의 원성(怨聲)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돌리려고 했습니다. 네로는 심한 그리스도교 박해정책(迫害政策)을 시작한 장본인(張本人)이 되었습니다. 네로는 궁전과 도시의 건축, 흥청망청 호화스러운 사생활(私生活)에 드는 막대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속주(屬州)의 금고(金庫)를 강탈(强奪)하였기 때문에 속주들은 점차 안정을 잃기 시작했고, 궁정에도 반대자(反對者)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66년 말 네로는 그리스 여행을 하기 위하여 15개월 동안 로마를 비웠습니다. 4년마다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고대 올림픽에 직접 참가(參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네로는 자기가 참가하는 시기에 맞춰 64년에 열릴 올림픽 경기를 2년이나 연기(延期)시켰습니다. 네로는 전차경기(戰車競技)의 기수(騎手)로서 사두마차(四頭馬車)의 다른 선수 들과는 달리 자기 혼자만 잘 훈련된 10 마리의 준마(駿馬)가 끄는 특수전차(特殊戰車)를 타고 출전(出戰)했습니다. 시합도중 코너를 돌다가 네로는 마차에서 떨어지는 실수(失手)를 저질렀습니다. 당연(當然)히 탈락(脫落)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시상순서(施賞順序)가 되자 승리의 월계관(月桂冠)은 네로 황제의 머리에 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68년 2월 로마로 돌아온 네로를 기다리는 것은 그에게 재산을 빼앗겨 반감(反感)을 품고 있는 귀족(貴族)들과 보수적(保守的)인 도덕관(道德觀)을 갖고 있는 군장교(軍將校)들이었습니다. 근위대(近衛隊)는 그를 버렸으며 그를 섬기던 해방노예(解放奴隸)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네로 자신도 로마 시를 빠져나와 도주하다가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합니다. 네로가 죽자 그리스 올림픽위원회는 네로의 전차경기 우승기록(優勝記錄)을 삭제(削除)했습니다.
네로의 머리에 씌어졌던 승리(勝利)의 월계관(月桂冠)이 벗겨진 것입니다.
(텔레비젼 다큐멘타리 필름과 네이버 오픈백과 사전을 보고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끝 -
이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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