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신 박영하 회장님은 1993년 10월에 프랑스 퐁텐블루에 있는 인시아드 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 단기 과정을 수학한 동문이십니다.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LG기공 최고경영자를 역임하신 존경받으시는 분이신데, 세월을 잊으시고 청년처럼 사시며, 젊은 사람들도 시도하지 못하는 도전을 하십니다.
옥룡설산 등정
옥룡설산玉龍雪山Jade Dragon Snow Mountain은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로서
중국 운남성雲南省 나시納西 티베트족 자치현의 여강麗江 서쪽 약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만년설산으로 산 정상에 쌓인 눈이 마치 한 마리의 은빛 용이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옥룡설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중국 서부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고산으로 13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봉은 선자두扇子?(5,596m)이다. 옥룡설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4,500m까지 올라가는 방법이 있는데 호도협 쪽에서 올라간다. 이번에 우리들은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반대편 쪽에서 직접 등반을 했다. 아직까지 정상 등반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상의 절벽에 가까운 바위들이 석회암인데 아이젠을 박을 수가 없어 (정상인 선자두에는 오르지 못하고) 우리들이 올라 간 대협곡(5,100m)이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정점頂点이라고 했다. 옥룡설산은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나시족들이 성산聖山으로 추앙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강麗江은 인구가 약 35만인 중소도시이다.
그옛날 차마고도의 중심지였다.
차마고도(茶馬古道)는 통상 보이차茶의 고향인 원남성 남부의 푸얼을 시발점으로 대리大里 - 여강麗江 - 샹그릴라를 거쳐 티베트 라싸까지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원남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한 데서 차마고도라는 말이 생겼다.
저지대 사람이 고지대로 오르면 고소증으로 고생을 하듯, 고지대 사람이 저지대로 내려오면 저소증을 앓는다고 한다.
여강麗江은 평균고도 2,400m의 분지로서 고지대 사람이나 저지대 사람 모두가 높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곳이다. 여강 심이호텔에서 자고 아침 6시 40분 호텔을 나서 차를 타고 옥주경천(2,750m)으로 갔다. 등반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마을 이름이 옥호玉湖마을이라고 했다.
마방馬房에 들려 각자 말과 마부를 배정 받고 출발을 했다. 처음 타 보는 말이라 겁도 나고 오히려 불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익숙해 졌다. 동네를 지나니 넓은 초원이다. 이런 곳을 뭐하러 말을 타고 가나 싶었다. 가이드 말로는 체력 안배를 위해 말을 타고 가는 거란다. 저 건너 산 허리로 구름이 덮히는가 했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필이면....
남들은 큰 말이었는데 내가 탄말은 작은 당나귀였다.
마부도 나이가 든 작달막한 코납작이였고. 그랬었는데 나중에 모두들 나를 부러워했으니.... 말도 좋았지만 마부가 노련했고 그래서 항상 앞장서 갔다.
말을 타고 오르면서 놀라웠던 것은 오르막 꼬불길을 평지인양 거의 뛰다싶은 속보로 올랐는데... 마부중에는 여자 마부도 둘이나 있었다.
그들은 운동화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그런 신발을 신고도 2700m 에서 3,700m 높이를 아무렇지도 않은듯 평지 걷듯 걸었다. 도중에 여러 번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 갔다. 말에게는 짐을 들어줘서 쉬게하고 우리들은 체력을 점검하고. 마황패(3,500m)를 지나 전죽림(3,670m)으로 올라, 컵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요기를 했다. 비가 멈추고 해가 비쳤다. 변화무상. 쾌청이었다.
말과 마부는 그곳에서 우리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우리는 정상을 향해 무거운 발을 내딛였다. 충초평(4,500m)을 지날 무렵부터는 앞서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와 구형 두 사람뿐이었다. 녹설해(4,900m), 안간 힘을 써도 써도 다리가 비틀거리고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기가 너무너무 힘들었다.
저기 꼭대기에 앞서 간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남은 고도가 200m쯤인데 도저히 올라갈 것 같지가 않았다.
구형도 힘 들어하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3시까지는 올라가야 한다.(하산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남은 시간이 30분.
산 위에서는 ’힘 내라’고 고함들을 질렀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기를 쓰고 올랐다.
비틀비틀 넘어질듯 넘어질듯 몸 가누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대협곡大峽谷 정상(5,100m)에 올랐다.
박수들을 쳤다.
오후 3시 정각이라고 현사장이 말했다.
붉은 글씨로 <5,100m>라고 씌어진 바위앞으로 나를 밀어올리더니 사진을 찍는다.
증명사진이라나.
대협곡을 내려다 보며 숨을 고르는데 모두들 하산을 서두른다.
그들은 나보다 40분~50분 먼저 올라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산을 하면서 나는 놀랬다.
다른 친구들도 놀랬다.
내려오면서 보니 우리가 올라간 길은 산사태가 난 것 같은 돌길이었다.
자갈도 아닌 것이, 모래도 아닌 것이 산 비탈을 덮고 있었다.
그걸 밟고 올라갔으니 얼마나 미끄러웠을까.
내려오면서는 거의 스키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런 길로 3,700m에서 5,100m까지 1,300m 높이를 올라갔는데 끝 없는 오르막 비탈길이었다. 저만치 올라가면 능선이 나올 것만 같이 보였었건만 올라가면 또 그렇고 또 그렇고. 올라가도 올라가도 계속 올라야 하는 미끄러운 비탈길의 연속.....
나는 내려오면서 놀랬다.
내가 어떻게 저런 길을 올랐을까?
다리가 풀려 뒤로 벌러덩 넘어지기도 하고 옆으로 꼬꾸라지면서 전죽림(3,670m)까지 용케도 내려왔다.
말과 마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제 살았구나 !
<해 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흥분이 되었다.
<세상에 어느 누구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흐뭇하고 기뻤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이제 이런 일은 더는 하기가 힘들어지겠구나> 하는, 약간은 서글픈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산을 내려와 여강 시내로 차를 타고 들어오는데 집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등정을 떠나기 전에도 나를 염려해서 마음을 쓰더니만 때를 맞춰 안부를 물어온 것이다. 반갑기 짝이 없었지만 남들 보기가 민망해서 한 소리했다.
"전화값 올라간다. 고마 끊어라 !"
오늘 새벽 5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이글을 쓴다.
친구들 !
고맙소.
그대들 덕분에 <가문의 영광>과 <내 알량한 체면>을 더 높였으니 뭘 더 바라겠소?
친구들이여 !
정말 감사하오.
이 은혜, 잊지 않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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