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광(疏廣)과 그의 조카 소수(疏受)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소씨(疏氏) 두 사람이 재산을 다 흩뿌린다는 말이다.
나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받은 하사품을 자신이나 집안을 위해 하나도 쓰지 않고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썼다는 뜻이다.
<한서 열전(漢書 列傳)>에 전한의 소광(疏廣)은 자를 중옹(仲翁)이라 하고, 동해군 난릉현 사람이다.
형의 아들인 조카 소수(疏受)는 자를 공자(公子)라 하였다.
이들 소씨(疏氏) 숙질(叔姪) 중 숙부(叔父) 소광은 태자태부(太子太傳:태자의 보좌 역)가 되고, 조카 소수는 태자소부(太子少傳:태부의 보좌역)로서 태자가 조정에 참내할 때마다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다.
그때 태부(太傳)는 태자의 앞에 서고 소부(少傳)는 그 뒤를 서서 숙부와 조카가 나란히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이렇게 숙부와 조카가 태자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드문 일로써 조정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큰 영광이라며 축하하였다.
그러나 소광은 소수에게 늘 말했다.
나는 예부터 전해 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다.
언제나 현실에 만족함을 알아서 무리한 욕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치욕을 받는 일이 없고 스스로 도달해야 할 곳을 알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면 자신의 몸을 위태로운 상황에 빠뜨리지 않는다.
또 공명을 세운 뒤에는 미련 없이 물러 나와 후진에게 양보하는 것이 하늘이 가르치는 도리이다. 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면서 천명을 누리며 여생을 마치는 것이 더 할 수 없는 행운이다.
이 말을 숙질(叔姪)간에 나누면서 두 사람은 사직서를 냈다.
황제는 이것을 허락하고 위로금으로 황금 20근을 하사했고 태자는 5O근을 하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퇴임하고 고향으로 떠날 때, 나라의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상급관리들과 같은 고향 사람들이 귀향하는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를 위한 조도(祖道:먼 길 가는 사람에게 술자리를 마련하여 이별하는 일)를 설치하고 수도(首都)의 동쪽 외곽문밖에 막을 치고 송별하는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수레의 수가 수백 량에 달했다.
그 후 소씨 숙질은 향리로 돌아와서는 매일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그동안 정을 나누지 못했던 일족의 사람들이나 옛날 친구, 빈객들을 초청하여 함께 즐겼고 비용은 하사받은 황금을 팔아 돈으로 바꾸어 대접 하는데 필요한 술과 음식 준비를 위하여 썼다.
그러자 사람들이 돈을 함부로 쓰지 말고 하사받은 금으로 전답(田畓)을 사 두라고 권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소광은
'나도 생각한 바는 있지만 우리 집에는 옛날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조금의 땅과 집이 있다.
자손들이 근면하게 일을 하면 의식을 해결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니 이 돈은 성스럽고 밝은 천자께서 늙은 나를 헤아려 내려주신 것이기에 고향 사람들이나 일가친척과 함께 써서 내 여생을 즐겁게 마칠 것이다'
라고 했다.
요즘에 '국가민족과 서민을 위하여 내 전부를 바치겠다'고, '나는 청렴한 사람이라'고 외치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언공약(公言公約)과 초심(初心)은 어디에 버렸는지, 현직에 있는 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국가의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고 혈안들이다.
이소산금 하던 청백리의 모습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격세지감으로 와 닿는다.
옛사람들은 소씨(疏氏) 숙질(叔姪)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복 하였다.
소광과 소수는 모두 칭송을 받으며 천명을 다하고 여생을 마쳤다.
이 두 사심(私心) 없었던 벼슬아치의 이야기를 당나라 초기의 문인 이한(李瀚)이 엮은 몽구(蒙求)에 실려 후대에 길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지난 시절에 비췄던 거울이 현 시대에도 비친다는 철리(哲理)를 알아야 한다.
동암 우성영 박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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