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아내라는 이름으로 사는 억울함

뚜르(Tours) 2011. 5. 6. 01:28

지난 주말 만났던 가정주부 친구는 “칼럼에 꼭 이지아 얘기를 써달라”고 했다. 아줌마들 사이에 이지아 팬이 늘었다고도 했다. 이유는 문화대통령 서태지와 결혼했기 때문도, 국민 미남 정우성의 연인이기 때문도, 한류 영웅 배용준 눈에 들어 발탁됐기 때문도 아니었다. 색다른 해석이긴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멀쩡한 아내를 ‘숨겨진 여자’로 살게 했던, 그 ‘대단한 남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기 때문이란다. 이지아는 남편에게 펀치를 날리고 싶은 아내들의 욕구를 통쾌하게 풀어준, 이 시대 ‘아내들의 헤로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남편들은 잘 모르는 아내의 얘기가 있다. 그건 많은 여자들에게 아내라는 이름은 억울하다는 거다.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가족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면면히 내려온다. 남편들은 여전히 아내가 자신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자식 길러주고, 때로는 무고하게 화풀이하는 것까지 받아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타고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도록 규정돼 있는 관계는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러니 억울하다.


    아내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게 있다. 가장 좋은 남편은 외항선 선장이라는. 한 번 나가면 반 년 이상 안 돌아오는데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고, 가끔씩 집에 오니 반가워서 좋다는 거다. 이에 남편이 방송국 PD인 한 후배는 “PD부인들 사이에선 다큐멘터리 PD가 최고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외항선 선장과 같은 이유에서다.

 한데 외항선 타고 나가주는 남편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남편은 매일 집으로 돌아온다. 게다가 연락도 없이 늦거나 느닷없이 밥을 내놓으라고 하는 통에 아내의 분통을 터뜨려 놓기도 한다. 물론 남편들도 이런 일이 편치 않은 것 같다. “늦게 들어가면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 괴롭다” “아내 눈치가 보인다”고 호소하는 남편들이 많다. 남편들은 그렇게 화내는 이유가 ‘심심한데 같이 안 놀아줘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들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가사노동과 헌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난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아내들이 매일 군말 없이 해내곤 있지만 가사노동은 그리 흔쾌한 일은 아니다. 나도 스트레스 강도 면에선 ‘내일 칼럼 뭘 쓸까’보다 ‘내일 아침 반찬 뭘 하나’ 쪽이 더 세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누구도 드러내 말을 하진 않지만, 이렇게 아내와 남편 사이는 일종의 긴장관계다. 물론 닭살 돋는 잉꼬부부도 있다. 한데 최근 읽었던 윤대현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의 칼럼에 따르면, 잉꼬부부들 중엔 아내가 자기 감정을 일방적으로 눌러서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지만 이게 아내 화병의 근원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 우리나라에 여성암 환자가 가파르게 늘면서 아시아 1위를 달리고 있는데, 환자들의 85%가 화병 증세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문병인 이대여성암전문병원 교수)도 있다. 50~60대 중년 여성 암환자들은 “수십 년을 아내로 엄마로 헌신하며 참고 살았는데 이제 좀 쉬려니 암에 걸렸다”며 분노를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내들에게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해 보라고 한다면, 많은 수가 ‘참고 산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아내들에겐 화병이 있다. 언젠가부터 아내가 침 맞고, 뜸 뜨고, 약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한다면 ‘화병’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개중엔 남편에게 멋지게 한 방 날리는 날을 꿈꾸는 아내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지아는 그런 아내들에게 대리만족을 선물해, 지금 여러 명의 남편을 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대리만족형 헤로인이 수시로 등장하진 않는다. 부부의 해피엔딩을 바란다면 이제라도 그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할지 고민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양선희 / 중앙일보 온라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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