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빛과 그림자(3) - 都市化의 그림자

뚜르(Tours) 2011. 6. 20. 00:20

 

현대인의 무의식에 대한 사고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우뇌와 좌뇌가 분리된 환자입니다. 그들의 뇌는 정반대의 일을 하려 합니다.
좌뇌는 구두를 벗으려 하는데, 우뇌는 오히려 신으려 합니다.
외부에서 보면, 이런 사람의 오른손은 양말을 벗으려 하는데, 왼손은 오른손을 제지하려 합니다.
좌뇌의 의식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본인은 왼손이 그렇게 방해공작을 펼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든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망설이고 고민할 경우 그런 상태에 빠집니다.
내면에 있는 나 - 무의식이 때로 의식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가는 한 고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당연한 진실을 무시해 버리면, 자신이 고뇌하는 상태나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절대적으로 확실한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해 과학이나 종교를 절대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폭력과 편견과 위선에 빠지는 신흥종교의 문제나, 뒤틀린 정치와 행정의 문제도 모두 여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런 식의 뒤죽박죽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화와 함께 그런 역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대도시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석유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문명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도시란 에너지가 없으면 성립할 수도,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석유라는 싼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여 전 세계에서 도시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도시화와 함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시대건 인간은 십대 중반이 넘으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이들이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여 마음껏 놀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중반의 대학생들에 의한 정치운동, 세계혁명운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젊은 이들이 모든 점에서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었는데, 이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홈리스의 존재가 전형적입니다.
홈리스가 발생하는 곳은 반드시 도시입니다.
홈리스는 경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신분이니까 말입니다.
경제 성장기에 왜 사람들은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상태를 손에 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선 지금, 텔리비전 뉴스는 매일 실업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말합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만화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실제로 일한 만큼 경제는 성장하고 사회는 더욱더 효율적으로 변했습니다.

홈리스도 굶어 죽지 않는 풍족한 사회가 실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업율이 높아졌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직업을 잃은 사람이 굶어 죽고 있다면 그건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홈리스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금방 잊어버리는 동물인 모양입니다.
20세기 전반의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선망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그런 사람들이 공원이나 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이상적인 상태로 생각하던 시절을
나는 아직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하고
우리가 부러워하던 시대가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


 

                       요로 다케시 지음 <바보의 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