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뚜르(Tours) 2011. 11. 29. 12:10

지난해 8월 한 대기업의 회장 A씨가 아내를 병으로 잃었습니다. 성매매 피해 여성의 재활과 치료, 교육을 돕는 한편 성매매 피해 여성 보호단체를 지원하는 공익단체를 설립해 활동해온 분입니다. 그렇게 남을 돕고 봉사하며 살던 사람이 그 자신의 병은 이기지 못하고 예순도 안 돼 숨졌습니다. 아내를 잃은 A회장의 상심은 말할 것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중년상처(中年喪妻)는 초년출세(初年出世) 노년무전(老年無錢)과 더불어 남자가 피해야 할 세 가지 악재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A회장은 장례를 치른 뒤, 슬픔을 누르며 다시 몸을 추스르고 정상적으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마주치는 사람마다 던지는 관심과 위로의 말이 오히려 부담스럽고 듣기 힘겨웠나 봅니다. A회장은 한동안 “나한테 ‘밥 먹었느냐’, ‘기운 내라’ 이런 말 좀 하지 마라”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하곤 했습니다. 애써서 겨우 기운 내고 나왔는데 기운을 내라니 그 말에 위로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파지고 기분이 우울해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큰 불행을 당했을 때, 따뜻한 관심을 기울이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쁨은 나누면 갑절이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데, 남의 불행을 보고도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대범하고 무심하게 대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건네게 되는데, 어떤 말을 해야 좋고 옳은지 그걸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A회장의 경우에서 보듯 듣는 사람은 위로의 말이 오히려 더 괴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문상을 간 사람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요즘 별일 없으세요?” “아버지가 직접 돌아가셨나요?”하고 물었다는 이야기도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전통 예법에는 “얼마나 망극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이 있지만, 요즘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해 봤자 알아듣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껏 묻는다는 게 “오래 편찮으셨나요?” “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셨지요?” 하는 정도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는 배꼽을 잡게 합니다. 다락에서 떨어진 다듬잇돌에 머리를 다쳐 숨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상주인 아들을 위로한답시고 “눈은 안 다쳐서 다행이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놓고 아차, 실수했구나 싶어 서둘러 나오는데 댓돌에 자기 신발과 상주의 신발만 있는 걸 보고는 “내 신발만 남겨 놓고 다 신고 갔네.”라고 헛소리를 했답니다. ‘아, 나 왜 이러지? 실수 연발이네’이런 생각을 하다가 마당에 내려와서는 나무에 앉아 있는 참새를 보고 “저 새는 댁에서 키우는 건가요?”라고 또 물었답니다. 꼭 옛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바보 같은데, 배웅하러 나온 상주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위로의 말을 뭐라고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게 된 이유는 재외동포 여성 B씨의 상의 겸 호소 때문입니다. B씨는 한국에 있는 아들 여자친구의 어머니가 암에 걸려 투병 중인데, 벌써 두 달도 넘게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몰라서 전화도 걸지 못하고 상의를 할겸 카페에 글을 올렸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B씨의 오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전화를 걸어 위로해 준 일도 있는 사람이랍니다. 그녀는 그때 “ΟΟ이 엄마, 뭐라고 할 말이 없네…그만 상심해라…우짜겠노…”라고 했답니다. 성격이 진중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한다는 사람다운 말입니다. 이런 위로의 말에는 표준말보다 사투리가 더 진정성과 온기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위로전화를 했고, 이제는 거꾸로 위로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좋은 것일까? B씨의 글에 대해서 한 카페 회원은 “맨날 벼르면서도 맘이 무거워 전화 못했어요. 어쨌든 힘 내세요, 이렇게 하라기도 뭣하고 정말 막막하네요.”라면서 오히려 B씨라도 힘을 내라고 댓글을 썼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그냥 전화기만 잡고 있더라도, 빨리 연락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나도 가만히 있기 뭐해서 “글쎄요. 이런 걸 ‘애정남’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마음 그대로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전화 못했어요.’ 그러고서 함께 울어주기!”라고 썼습니다.
 

요즘 인기 높은 개그콘서트의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 주는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거나 애매한 것들이 세상살이에는 참 많습니다. 이 경우도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지 ’애정남’에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B씨의 글을 읽은 회원이 많은데도 평소보다 댓글이 훨씬 적은 것을 보면 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의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차일피일 망설이며 미루다가 그녀가 세상을 뜨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은 B씨 본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에 상처 받은 어떤 여성이 자신이 들은 위로의 말에 대해 한마디씩 써놓은 글을 보면 남을 위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게 됩니다. 그 여성 가라사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구? 흥! 내가 얼마나 긍정적인 사람인데. 너보다 (고통이) 더 심한 사람도 있다구? 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냐? 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나가서 좋은 공기 쐬며 운동하라구? 내가 살쪘다 그 말이지? 다 잘될 거라구? 그러면 지금 나는 실패자라 그 말이네?”, 이렇게 투정 부리듯 어깃장 놓듯 하던 그 여성은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역시 ’술 사줄 게’, 이거야”라고 글을 맺었습니다. 함께 술 마시며 역성 들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가장 위로를 잘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남을 위로하는 데는 좋은 말, 메시지가 강력한 말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유리할 수 있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정호승의 ‘수선화에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아’), 이런 말들 말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많이 팔리는 이유도 제목에 담긴 위로의 메시지 덕분일 것입니다.
 

페르시아 시대의 우화에 나오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사람이 슬플 때 기쁘게 만들고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들어주는 반지에 새겨진 말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만 해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푸쉬킨의 <삶>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인내와 성공을 위한 교과서적 계명처럼 받아들여지던 이 시에도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이며 지나가는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슬픔이든 고통이든 사실은 다 지나가는 것이지요.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도우려 하지 말라. 스스로 그 처지에서 벗어날 것이다”(프랑스 시인ㆍ영화감독 장 루슬로)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믿지 말고 우리는 다친 달팽이를 도우려고 해야 합니다. 아무리 통속적이고 흔한 말이라도 상대의 마음에 가 닿으려고 하는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위로의 언사가 공허한 말장난처럼 보이겠지만, 인간이 끝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것은 결국 언어가 아니겠습니까? 서투르든 멋지든 위로란 상대방에게 말과 함께 내 마음을 통째로 주는 일입니다.


 

                       임철순: 한국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