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주 유격수가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수비가 엉망이었다.
참다 못한 감독이 글러브를 끼고 시범에 나섰다.
첫 번째 타구는 내야 땅볼이었다.
감독이 글러브를 갖다 댔지만 가랑이 사이로 알을 까고 말았다.
다음은 정면을 향하는 직선타.
그러나 공은 감독의 글러브를 맞고 튕겨 나갔다.
세 번째는 평범한 내야 플라이였다.
“마이 볼” 외침도 끝나기도 전, 공은 그만 감독의 이마에 박혀버렸다.
글러브를 집어 던지며 감독이 말했다.
“봤지? 존스. 네 녀석이 한번 그 자리를 망쳐놓으면 아무도 그 자리를 맡을 수 없는 거야!”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즐겨 하던 농담이란다.
사임한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생뚱맞게 레이건이 떠오른 건
그들만큼 정책에 관심이 없던 국가지도자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서일 터다.
17년 정치 경력 중 10년간 총리였던 ‘총리 전문’ 베를루스코니지만
성 추문과 비리 의혹, 마초 발언, 외국 정상들에 대한 결례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
레이건을 폄하하는 사람들 눈에는 레이건 역시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대중연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는 국민들 야유 속에 떠나야 했고, 누구는 올해 미 여론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 1위에 올랐다. 차이가 뭘까.
레이건은 농담 속 유격수를 전임 대통령들로 여겼다.
그들 탓에 엉망이 돼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거란 얘기였다.
1976년 카터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조합한 ‘불행지수(Misery Index)’를 고안했다.
이에 따르면 그해 불행지수는 13.5였고 그걸로 포드를 박살냈다.
하지만 그가 레이건을 상대로 재선에 도전할 때 불행지수는 20.6으로 폭등했다.
레이건 취임 첫해 경제는 끔찍했다.
실업률이 10%를 넘는 대공황 이래 가장 가파른 추락이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이를 바꿔놓았다.
83년 경제는 급상승으로 반전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칼럼니스트 로버트 바틀리가 ‘배부른 7년’이라 부른 시간이 이어졌다.
레이건 퇴임 때의 불행지수는 8이었다.
개인자유와 시장경제에 목청 높였지만 그의 최우선 가치는 경제 이상이었다.
그것은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적하듯 “가족과 이웃, 애국심 같은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환기”였다.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되찾게 만드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민주당도 갖지 못했던 그 믿음을 일관되게 견지했고 국민들은 대통령과 같은 신념을 공유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곧 ‘정치력’이었고 90년대까지 이어진 미국의 성장동력이기도 했다.
베를루스코니라고 ‘붕가붕가 파티’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런 면에서 레이건에게 상대가 안 됐다.
우리 앞길이 구만 리인데 이탈리아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겠다.
정치를 혐오하다 정치력까지 잃어버린 전임자 보며 후임자가 명심할 말이 있다.
명칼럼니스트 조셉 앨섭의 말이다. “위대한 대통령이 되려면 먼저 훌륭한 정치인이 돼야 한다.”
이훈범 / 중앙일보 j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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