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광

아씨시의 聖女 글라라

뚜르(Tours) 2012. 8. 11. 08:57



그대의 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리십시오.
-성녀 클라라-

성녀 클라라께 드리는 기도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는 성녀 클라라여
당신은 가난하게 구유에 누워계셨고
겸손하게 인류구원을 위해 수고와 고통을 참아 받으셨으며
사랑때문에 십자가상에서 수치스런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관상하고 흠숭함으로써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놀라운 사랑의 은총으로
그분과 하나되는 탁월한 길을 보여 주셨나이다.

주님의 정배시며 사부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이신 클라라여
저희도 당신을 본받아
기도와 사랑으로 주님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시고
그분과 영원히 결합되는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성녀 클라라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클라라 초상(2003년8월11일.서거 750주년)


2003년 8월 11일은 성녀 클라라 서거 750주년 안에서 지내게 될 성녀 클라라 축일입니다.
다음의 내용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성녀 클라라 탄생 800주년에 쓰신 서한내용의 일부입니다:

“두 분 성인(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은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프란치스칸 본래의 이상을 증거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성녀 클라라와 자매들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보속의 관상생활로 복음을 생활화함으로써 서로를 보완하였습니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 성 프란치스코 안에서 자신을 보고 스스로 성인을 반사한 성녀였지만,
성녀에 대한 생각과 그 기도에 대한 확신이 성인에게 용기를 주었듯이

같은 영으로 결합된 성녀의 가난과 순결의 빛은 아시시의 가난뱅이의 얼굴을 더 밝고 따뜻하게 비추어 주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서로의 복음적 소명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성녀 클라라를 새로이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피합니다.
이는 교회의 삶과 생존에서 아주 중대한 안건입니다.”


프란치스칸 운동의 공동 창설자로고 일컬어지는 성녀 클라라는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권고 12.누가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가

1) 하느님의 종이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를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
2) 주님이 그를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신은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3) 인간의 육신은 항상 모든 선을 거스르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천한 자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작은 자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성녀 클라라

1212년 3월 18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은 클라라가 자기 집을 몰래 도망쳐 나와 포르치운쿨라에서 프란치스코에게 순종서약을 한 날입니다.
클라라가 성 프란치스코에게 순종을 서약한 것에 대해서 전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이제 그 어떤 외적인 것과도 인연을 끊고 온전히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히 그녀를 세속과 멀어지게 하는 행위 하나하나는

곧바로 참되고 영원한 행복의 언약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누이요 정배이며 어머니가 되어 마치 이른 봄날 대자연이 터뜨리는 환호성마냥,
한 영혼을 온전히 소유하신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그분만이 주실 수 있고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새로운 기쁨을 옷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 성녀 클라라, 66쪽)


축일: 8월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St. Clare of Assisi
Santa Chiara Vergine
St. Clara, V

Assisi, 1193/1194 - Assisi, 11 agosto 1253


세상을 비출 빛이여!
아씨시의 聖女 글라라

☆Chiara di Favarone


이탈리아 아씨시의 귀족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똘 라나(Ortolana)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글라라의 이름은
어머니가 기도중에 온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데서 비롯되었다.
과연 그녀는 열심한 기도와 착한 행실로 주위를 밝게 비추며,
늘 하느님의 은밀한 부르심에 귀 기울였다.

☆수도자의 길로!
이러한 글라라가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마침내
1212년 3월 18일 성지주일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보속의 수도복’으로 착복되고 순명을 서약하였다
아직 형제회에 여자 수도원이 없어서 근방의 베네딕도 수녀원에 머물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글라라를 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녀는 축성의 표시인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뜻을 단호히 밝혀 부모의 애원을 뿌리쳤다.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
얼마후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뒤를 따르자 친지들은 아녜스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글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에게서 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첫 자매를 얻은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성녀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비롯한 몇몇 자매들 과 함께 성 글라라 수도회의 모태가 된 성다미아노 수도원의 봉쇄 안에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공동체 생활로 ’하느님의 구원 성업을 거드는 짝이며
성교회의 심장으로서 그 연약한 지체를 떠받치는 받침대’가 되는 프란치스칸적 관상의 삶을 시작하였다.

☆’산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 를 모방하는 기도생활
글라라는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자매들의 모든 기쁨과 아픔에 함께 하였고
수도원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자매들의 비천한 여종이 되어 겸손하게 수하자매들을 섬겼다.
또한 그녀는 분별력있고 지혜로운 수도원장으로서 자매들의 의견에 늘 귀 기울이며 그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려 애썼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육화한 ’가난한 동정녀’로 살았던 글라라에게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작은형제들은 물론이요 교황과 추기경 및 왕과 귀족들까지 기도를 부탁하며 자문을 구하러 왔다.
프란치스칸 관상생활의 첫 터전이었던 아씨시 근교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은
글라라가 수도가족 뿐 아니라 세상 모든이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삶의 현장이었다.




아씨시에 사라센 대군이 쳐들어 왔을 당시 글라라는 자매들의 부축없이는 자신의 몸조차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지만
무방비 상태에 놓인 수도가족과 아씨시 시민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오로지 성체께 의탁하고 기도하여 이미 봉쇄구역안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작은 빵 하나를 50여명의 수녀들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하였으며,
간절한 이웃 사랑에서 우러난 그녀의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가 완쾌 되었다.

또 1252년 성탄밤, 중병으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아기예수를 경배하고 싶은 큰 열망으로,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녀를 텔레비젼의 주보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42년간의 수도생활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면서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신비는 삶 자체로 드러나는 그녀의 기도에 있었다.
글라라에게 있어 기도는 자신의 존재 전부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함이었고, 수도원의 봉쇄는 주님과 단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었으며,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성녀 글라라
모든 사람과 사물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고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글라라는

1253년 8월 11일, 세상에서의 마지막 찬가를 부르면서 찬란한 빛이신 하느님께 옮겨갔다: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시성자료집)

글라라는 1255년 시성되었으며, 성녀의 삶이 배어있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성당과 유해가 모셔진 아씨시 성 글라라 대성당(S.Chiara)은

오늘날까지도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녀의 삶은 자신을’창조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 으로 충만케 하셨으며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와도 같이 사랑해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오롯한 응답이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기쁨’ 가운데 ’하느님과 이웃을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한’ 성녀의 삶은
그녀의 이름처럼 오늘날 감각적 사랑과 물질만능주의에 빠 져가는 이 세상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성인의 말씀
가난한 동정녀로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관상하시오.
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찬미와 흠숭을 드리시오.
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님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님의 어지심은 우리의 만족입니다.
관상을 통하여 전존재를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시오.
저를 창조하신 주님, 찬미받으소서.






212년3월18일뽀르지웅꼴라에서 프란치스코 앞에서 착복식을 하고 순종을 서약함.

1212년 성지주일에 아시시의 공작 스티피가(家)의 저택 뒷문으로 신부(新婦)같이 단장을 한 어떤 귀부인이
시종으로 보이는 여인과 더불어 포르찌웅콜라 소성당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성당 앞까지 왔을 때, 성당 안에서는 수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나와 그들을 영접하며 그 귀부인을 제대 앞까지 인도했다.
곧 엄숙한 기도와 성가가 교대로 온 장내를 울리었고, 다시 조용해지자 그 부인은 삭발을 하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소복으로 온 몸을 두르고

노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서는 제대 앞에 엎드렸다. 도대체 이는 무슨 일이며 그 귀부인은 누구였을까?



그로부터 3년 전, 같은 동네의 대부호안 베드로 벨라도네라는 한 상인의 아들인 프란치스코가 뜻한 바가 있어 집을 떠나 예전과는 달리 모든 사치를 버리고 청빈한 생활을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간주했으나, 그의 철저한 금욕과 극기의 생활로 모범을 주며 입으로 가르친 그 복음적 생활은 그들을 감동시켰고,
마침내는 그를 예수께서 다시 오신 것처럼 공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스티피 공작의 장녀 클라라도 끼어 있었다.

성녀클라라의 흰드레스와 성프란치스코와 성녀클라라의 수도복


성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의 의견을 듣고 그 사람됨을 살펴본 결과 하느님께 대한 비범한 그녀의 사랑이며 복음적 생활 실천에 관한 열망과, 넘치는 그녀의 희생과,
기도의 정신이 있음을 알고 즉시 수도 생활을 할 것을 권고했다. 앞서 말한 귀부인은 바로 클라라였고, 포르찌웅콜라 소성당에서 거행된 예식은
클라라가 부모 형제를 끊고 프란치스코의 영적 자녀로서 청빈의 생활로 발을 옮겨 놓은 착복식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최초의 여자 제자이며 소위 프란치스코 제 2회 즉 클라라회의 창립자로 어머니가 되었다.
클라라가 집을 나간 것을 안 스티피가의 가족은 조사한 결과 그녀가 수녀로서 서약을 했다는 것을 알고 일가중의 여러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데려오려고 했다.
세속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던 그들을 그녀의 청빈의 생활을 가장 수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

그녀의 친척들이 클라라를 찾으러 갔을 때 그녀는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이 클라라를 데리고 가려고 하자 그녀는 제대를 꼭 붙들고
자기의 삭발한 머리를 내보이며, 일단 도를 닦기 위해 결심한 것이니 돌아 갈 수 없다고 하며 단호히 거절했으므로,하는 수 없이 그들은 그냥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클라라의 동생 아녜스도 언니의 수도 정신에 대단히 감탄하여 자기 언니와 같이 수도 생활을 하고자 몰래 집을 나와버렸다.
이렇게 연거푸 일어나는 사고에 스티피 가족은 격분한 나머지 부하를 보내어 아녜스를 끌어내게 하여 발로 차며 밟아서 매우 혼을 내게 하고, 마구 끌면서 집에 데려가려고 했다.
이런 봉변을 당하는 동생을 위해 클라라는 하느님께 그 보호하심을 구하였더니, 신기하게도 그녀의 체중이 천근이나 되어 너무 무거워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급변의 사실을 본 사람들은 물론 놀랐고, 이는 하느님의 안배하심이라하여 마침내 아녜스에게도 수도 생활을 허락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 다미아노 성당의 옛 가대

성 프란치스코는 성녀 클라라와 그 동료들에게 성 다미아노 성당을 본거지로 주었다. 이 성당은 너무 오래되어서 모두 부서졌었는데,
수년 전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독자적으로 수리한 실로 유서 깊은 성당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가끔 "얼마 안된 이곳에는 경건한 부인들이 모여서 살 것이며,그들은 완덕의 생활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와 교회에 기쁨을 주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자처럼 말했다.
과연 이 말씀은 실현되어, 그로부터 42년간 클라라와 그 제자들이 복음적 완덕의 생활을 했다.

성녀의 자기 육신을 다스리는 극기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아시시의 주교와 성 프란치스코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해 극기의 생활을 완화하고
육신적으로보다 정신적으로 더 깊은 희생을 하라고 엄명했을 정도였다.

클라라의 수도 정신은 남달리 강했지만 몸은 약한 편이어서 그런 엄격한 고행의 생활은 곧 그녀의 건강을 헤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병석에 눕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을 감심으로 참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찬미하며 그러한 병고에도 틈틈이 제복을 위한 바느질을 하고 아름다운 자수를 놓아서

이를 움브리아 지방의 가난한 교회에 보내기도 했다.

클라라는 모든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극히 엄격하면서도 아래 수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어머니와 같이 인자했다.
그래서 그녀의 덕을 사모하여 그 지도를 바라며 각지에서 그녀의 산하에 모여드는 소녀들이 날로 증가했으며 그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었다.
클라라의 어머니 오르톨라나디도 남편의 사망 후 그 수도원에 와서 딸 밑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고 한다.

회칙에 의하여 그 회는 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많은 수녀를 데리고 수도원을 이끌어나가야 되는 클라라는 하느님의 안배하심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뢰심으로 극히 궁핍할 때에는 가끔 기적도 일어났다.
예컨대, 빵 한개로써 많은 수녀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많아진 기적이며, 혹은 십자가를 그음으로써 비어 있던 기름단지에 기름이 가득 채워진 기적이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당선된 당시의 추기경 후고리노가 그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식사때에 클라라는 추기경의 강복을 청했으나 오히려 추기경이 클라라에게 강복하기를 명하므로 겸손한 그녀는 곧 그 명대로 한 십자가를 그으며 식탁을 강복하자
갑자기 그 위에 놓여 있는 빵마다 조그마한 십자가 표시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녀의 강복으로 중환자가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St Clare with the Scene of the Siege of Assisi
-CESARI, Giuseppe Oil on panel, 37 x 45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1240년 독일의 황제 프리데리코 2세와 동행한 사라센 대군잉 움브리아 지방의 스포레트와 각 도시, 마을을 점령하고 아시시에까지 침입했을 때,
클라라 수녀원도 위험한 처지에 놓여졌다. 그때 그녀는 성당에 들어가 제대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동정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하오니 당신이 직접 그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보호하시어 적의 손에 넘기지 말게 해 주십시오"하며
뜨거운 기도를 바치고 일어나서 성광을 모시고 천천히 적군들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손에 쥐여진 성광에서 기이한 빛이 발사되어 이교도인 적들은 눈이 부셔서 겁을 집어먹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그 후 클라라는 교황 및 성 프란치스코의 엄명에 의해 수도원 총장이 되었으나, 그녀의 겸손은 감소됨이 없었다.
하루는 그녀가 다른 수녀원에서 온 수녀의 발을 씻겨주고,그 발을 친구하려고 했다.
깜짝 놀란 그 수녀가 발을 웅크리다가 잘못하여 클라라의 얼굴을 차서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조금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미소를 띤 채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발을 잡아 부드러운 친구를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겸손지덕인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를 영적 아버지로, 또 자기는 그의 작은 싹으로 생각하고 항상 그를 존경했으며 그의 높은 덕을 볼때마다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또 프란치스코도 클라라의 뛰어난 종교적 소질을 보고 이를 열심껏 지도했으며,기회 있는대로 좋은 훈계를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들이 만나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임종시에 클라라와 그 수녀들에게 사후에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 약속은 곧 이루어졌다.
믈라라와 그 수녀들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수녀원으로 모시고 온 성인의 유해를 앞에 놓고 뜨거운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서 충실히 프란치스코의 덕행을 따른 클라라의 서거도 그와 비슷했다.


자매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클라라, 성녀의 유해

즉 성인이 제자들에게 한 것과 같이 클라라회 수녀들에게 일일이 사랑의 축복을 해 주며 1253년 8월 11일 아침에 잠들 듯이 조용히 이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는 성녀라고 불리던 클라라는 사후 2년만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정식으로 성인품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성녀는 텔레비젼의 주보성인이며,문장은 성체 현시대입니다.



성녀 글라라가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Edit. I. Omaechevarria, Escritos de Santa Clara, Madrid 1970, pp.339-341)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생각 하십시오.

전심으로 그리스도께 매달려 그 거룩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상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놓습니다.

그분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만족입니다.

그분의 감미로움은 우리를 가득 채워 넘쳐흐르게 하고 그분에 대한 기억을 감미로운 빛으로 빛나게 하며

그분의 향기는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분을 직접 보는 영광스러운 천상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들에게 행복을 줄 것 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없는 거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여,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안팎으로 단장하고 여러 색깔의 꽃들로 치장하여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의 딸과 정결한 정배에게 있어야 하는 온갖 덕행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거울 전체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 거울에는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먼저 거울의 맨 밑에서부터 본다면 말 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누워 계신 분의 가난을 볼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여! 비할 수 없는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다음으로 거울의 중간을 본다면
그 분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겪으신 무수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분께서 지니신 겸손과 복된 가난을 볼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거울의 맨 위를 본다면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신 이 거울께서 십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 계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겪던 고생 같은 고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외치고 울고 있는 그분께 한마음 한 목소리로 대답합시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내 마음 괴로워하겠나이다."

천상 임금의 왕후이신 아녜스여, 당신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 안에 이 사랑의 불이 더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임금님의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부요와 끝없는 영예를 바라보시고 열렬한 갈망과 마음의 사랑으로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분께 이렇게 외치십시오.
"오, 천상의 신랑이시여, 날 이끌어 당신을 뒤따르게 해주소서. 싱그럽기 그지없는 당신의 방향으로 줄달음쳐 가리이다."
"당신께서 나를, 술방으로 이 몸을 데리고 가실 때까지, 당신께서 왼손으로 내 머리 받치시고 당신 바른손으로 기쁘게 이 몸 안아 주시며

당신의 그 입술로 나에게 입맞춰 주실 때까지, 나는 지치지 않고 달려 가리이다."

사랑하는 아녜스여,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할 때 이 가련한 어머니를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 대한 기억은 내 마음 안에 굳게 새겨져 있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 축일:3월2일,인창동성당게시판993번)



1194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탄생함.
1206-1211 프란치스코의 회개과정을 목격하고 1210년 그의 사순절 설교에 감동되어 몇 차례 프란치스코를 만나 자기 뜻을 밝힘.
1212년3월18일
밤에 글라라는 자기집을 몰래 떠나 뽀르지웅꼴라에서 프란치스코 앞에서 그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착복식을 하고 순종을 서약함.
임시로 바스띠아의 성 바오로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머물다가 얼마 후 수바시오 산 아래 성 안젤로 베네딕토회 수녀원으로 자리를 옮김.
글라라의 동생 아녜스가 여기서 입회하여 언니와 같은 생활을 시작함.
1212-1213
글라라는 아녜스와 동료 몇 명과 함께 자기들을 위하여 프란치스코가 마련한 성 다미아노 수녀원으로 이주하여 이곳을 ‘가난한 자매들의 회’ 모원으로 삼음.
프란치스코는 자매들을 위하여 ‘생활양식’을 써줌.
1215 성 다미아노 공동체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베네딕토회 회칙을 따르게 됨. 이에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명에 따라‘원장’이라는 명칭으로 원장직을 맡음.
1216 글라라는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음.
1218 시토회 출신인 암브로시오가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순시자로 임명됨.
1218-1219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들의 정신에 따라 성 다미아노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들이 여러 곳에서 발생함. 이 자매들은 처음에 ‘다미아니떼’라고 부름.
1219
우고리노 추기경이 성 다미아노 수녀원이나 다른 다미아니떼 공동체들을 위하여 고유한 회칙을 씀.
이에 따라 자매들은 1219년부터 1247년까지 우고리노의 회칙을 따라야 했고 법적으로 베네딕토회의 회칙을 써야 했다.
1227 우고리노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되어 순시나 기타 제2회를 돌볼 책임을 작은 형제회에 맡김.
1228 프란치스코의 시성식 관계로 아시시로 간 그레고리오 9세가 글라라를 만나 그녀의 요청을 받고 9월 17일자로 “가난의 특전”을 재확인함.

1230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피렌체에 있는 몬티첼리 수녀원의 원장으로 파견함.
1247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제2회 자매들을 위하여 새 회칙을 작성하여 인준함. 내용은 우고리노 회칙과 큰 차이가 없지만, 회칙 안에서 베네딕토 회칙의 법적인 효력을 폐지시키고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서약할 것을 결정함. 따라서 교회법상 제2회 자매들이 처음으로 프란치스칸들이 되었음. 또한 교황은 자매들을 작은 형제회에 직속시켰음.
1248 6월 17일에 라이날도 추기경이 글라라회의 “보호자 추기경”으로 임명됨.
1252 글라라가 인준 받은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관상생활에 적용하여 자매들을 위하여 직접 고유한 회칙을 씀. 라이날도 추기경이 교황의 이름으로 9월 16일에 이 회칙을 인준함.
1253
글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넷째 편지를 보냄. 글라라가 유언을 씀.

8월 9일에 인노첸시오 4세가 글라라가 쓴 회칙을 인준함. 8월 11일에 글라라가 회칙을 가슴에 안고 세상을 하직함. 그의 유해는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 안치됨.
1255 교황 알렉산드로 4세가 아시시 대성당에서 글라라를 성녀품에 올림.
1255-1256 토마스 첼라노가 글라라의 전기를 저술함.
1260 10월 3일에 글라라의 유해는 성녀를 위하여 건축된 글라라 성당에 안치됨.
1850 글라라의 시신이 상하지 않은 채로 발견됨.
1893 글라라의 회칙의 원본이 성녀의 수도복 속에서 우연히 발견됨.(양평 성 클라라 수도원홈에서www.clara.or.kr)



성 다미아노 대성당(성 클라라 대성당 Clare of Assisi The Church)


♬태양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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