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일제하의 학생생활

뚜르(Tours) 2012. 11. 18. 09:50

요즘 독도,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의 관계가 불편한 상황에서
저의 큰 형님되는 가톨릭의대의 이용각 명예교수 이야기를 잠깐 써 볼까 합니다.
-1983년에 있었던 일-을 그의 자서전 "갑자생 의사"에서 전재합니다.

(일제하에서 함께 공부한) 나의 일본인 동창들은 일본 본토로 건너가 모교가 없는 설움을
’유린’이라는 경의전 동창회에 참가하여 우의를 다지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 명부록을 보면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03년에 시작하여 1945년까지 43년간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그 중 대부분이 일본인 학생임을 감안하면 일본에 있는 경의전 졸업생 의사 수는 대단히 많았다.
나와 동기동창도 80명이나 되어서 이들은 동기동창회 이름을 이십회 (소화 20년)라고 따로 정하고
매년 일본 각지의 도시를 돌면서 동기동창회를 열고 회보를 작성하여 우리 한국인 동문에게도 보내 주곤 하였다.


해방후 40년이 지난 어느 날, 일본 동창 이십회 회장인 "쓰마가리"박사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내용인즉 지난번 동창회모임에서 나온 말인데
"이제 우리들도 회갑이 지나고 늙어 가는 마당에
한국에 있는 동창들과도 함께 동창회에 모여 친교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실이지 나도 바쁜 교직생활에 일본 동창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더군다나 불쾌했던 일들을 회상하기도 싫었다.


편지를 받고나니 옛날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나는 쓰마가리 회장에게 답신을 했다.

"학형의 편지 반갑게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연로한 마당에 한국과 일본 동창이
옛날의 불미스러웠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함께 모여 친선을 도모하자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우의는 과거의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서로 용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면 40여년 전, 일본 동문들이 우리 소수 한국인 학생에게 집단 ’린치’를 가해
어린 우리들 가슴에 못을 박아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것을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그냥 잊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당신과 같은 몇몇 분별력 있는 동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본 군국주의의 집단정신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특히 씨름부(스모부)의 스토 동문과 나까바야시 동문 등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공포를 주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우의를 다지려면 우선 이분들과 화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서 쓰마가리회장의 답신이 왔다.

"이형의 편지를 받고 일본의 동문돌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당황했습니다.
이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동창회보에 게재 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입니다.
이형의 너그러운 양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도착한 동창회보에는 나의 편지 내용이 실려져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동문들이 나의 말이 당연하다는 글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한국동문 이용각의 생각은 옹졸하다’, ’코흘리개 소년시절 일을 회상할 필요가 없다.’라는 동문 고광도 교수(재미)의 글도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 규슈로부터 두툼한 붓글씨 편지가 왔다.
’스토’동문의 편지였다.


"존경하는 이형!
나는 지금 몸이 불편해서 대필로 이 편지를 씁니다.
이형의 편지를 읽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며칠 밤을 못 잤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만용을 부려 이형과 한국동창을 괴롭힌 것을 참회합니다.
죽기 전에 이형의 너그러운 용서를 얻는다면 이제 평안히 여생을 지낼 수 있겠습니다."


"존경하는 스토 학형!
귀형의 펀지를 받고 감격하였습니다.
같이 늙어 가는 마당에 사과의 편지를 쓰신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피차간의 아픔은 이제 상쇄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귀형과 나는 동문 중 누구보다도 친한 형제 같은 우정을 느낄 것입니다.
가까운 장래에 한국 아니면 일본에서 우리 서로 만나서 형제의 우의를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그 후 일년, 나는 규슈 후꾸오까시에서 열린 국제 혈관외과 심포지엄에 참석하자마자
’스토 ’동문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전하였다.
그는 이튿날 새벽에 호텔로 나를 찾아 왔다.
나를 보자마자 거구의 몸을 나한테 기대면서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택시를 대절하여 5시간이나 달려 왔다는 것이었다.
부인도 연실 허리를 굽히며 자기 남편(주인)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실로 난감해서 몸둘바를 몰랐다.
’친구로 만나러 왔는데 용서는 무슨 용서입니까?
그리고 부인께서는 우리들 어릴 때 일을 왜 자책하십니까?’라고
겨우 달래서 같이 차를 마시고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실로 엄청난 감격적인 경험이요 회우였다.
그는 당시 최신형 Nikon카메라를 사양하는 나에게 주고 떠났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그도 나도 몰랐다.


이듬해이었던가 그의 서거를 알리는 전보가 날아왔다.
삼가 그의 명복을 빈다.
그도 아마 이 일에 관한 한 편안한 마음으로 떠났을 것으로 생각되고 나도 위안을 얻었다.
그의 아들은 당시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며, 나는 그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1995년 여름 경의전 동기동창회가 졸업 50주년을 기리는 모임이 일본 나고야시에서 열렸다.
나는 부부동반으로 유일한 한국동창으로 참석을 하여 우의를 다졌다.
이제 일본 동창의 수도 반으로 줄고 생존 40여 명 중 20 명가량이 일부 부부동반으로 모였다.
세월의 힘은 무서웠다.
일본 동창들끼리도 50년 만에 처음 만나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용경의 세상보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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