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예 제도는 일왕을 중심으로 일본 정부와 군대에 의해 입안. 설치되고, 관리•유지• 조장됐다. 성노예 장소는 고도로 통제되고 제도화된 시스템 아래에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무장경비병의 순찰 감시를 받았다. 성노예 장소 소위 일본이 말하는 '위안소'는 일제가 저질렀던 전쟁터에는 어김없이 설치되었다. 일본 본토는 물론이고 중국. 동남아시아 등 각 지역이었다.
아시아침략전쟁 말기 1944에서 1945년 사이 오키나와에는 120여 곳의 위안소가 설치돼 적게는 500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의 성노예 여성들이 강제 동원되었다.그러나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설치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성노예 여성들이 동원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일제가 패망하자 대부분의 성노예들을 학살시켰고, 당시 모든 서류 파기 및 현재까지 그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하여 실태 파악에 전혀 협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5년 6월 17일 중앙일보가 보도한 상하이 사범대학 역사학과 쑤즈량(蘇智良.중국위안부연구센터 주임)학자의 13년간 성노예(위안부) 조사 실태를 살펴보면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 149곳이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위안소 수가 너무 많아 놀랐다" "일본 해군사령부가 있던 훙커우에만 70여 개의 위안소가 몰려 있었다" 또 36년부터 상하이 거주 조선 상인들이 운영하던 술집 등도 '일본군 위안소'로 대거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들이 운영하던 '런던 주점'과 '아리랑 주점' 등이 위안소로 운영됐고 그냥 위안소로 불린 곳도 여러 곳 있었다"고 말했다. 또 조사 결과 위안부 여성들은 일련번호를 부여 받고 작은 쪽방에서 기거했으며 감금과 폭행에 시달리는 등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성노예 여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위안소 규칙이 있었다. 위안소 이용규칙에는 이용시간. 성병검사. 요금. 휴일 등에 관한 세부사항까지 규정되어 있으며, 특히 위생관련 규칙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터에 규칙이 없듯이 이러한 규칙은 한낮 허울에 불과했다. 성노예 여성들은 겨우 다다미용 침대 하나 놓여 있는 조그만 쪽방에서 아침부터 초저녁까지는 병(兵), 초저녁부터는 하사관, 야간에는 장교를 상대하는 초 강행군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특히 장교들은 새로 들어오는 깨끗한 성노예들을 독차지할 수 있었으며 숙박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