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를 다시 보자.
생김새를 볼라치면 괴이하기 짝이 없다.
웬만한 소형 트럭보다 무거운 몸을 갑옷처럼 두꺼운 피부로 감싸고 있다.
중력을 거부하듯 치솟은 뿔 역시 운치 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다.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거나 땅을 파헤치는 모습은 바보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폴 존슨은 이런 코뿔소를 다른 각도에서 봤다.
1년 전 포브스지에 실은 ’코뿔소 이론(Rhino Principle)’이란 칼럼을 통해서다.
그는 코뿔소를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존재했던 네발 달린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육중한 갑옷을 몸에 두르고도 살아남은 존재’로 규정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동물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생태계를 헤쳐나갈 야수 같은 공격성도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코뿔소가 빙하기를 관통하며 수천만 년의 세월을 멀쩡히 살아남은 이유는 뭘까.
존슨은 코뿔소의 우직 단순성에 주목했다.
일단 목표를 정하면 전력을 다해 돌격, 돌격에만 몰두하는 특성이 코뿔소를 살렸다는 것이다.
평소엔 느려 터진 코뿔소지만 위기를 맞아 우지끈 돌격할 때 최고 속도는 시속 40㎞를 웃돈다.
최대 중량 3.5t을 넘는 생물체가 이 정도의 순간속도를 내는 것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이런 기세 앞에서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라 하더라도 짓뭉개지거나, 아니면 줄행랑을 치는 수밖에 없다.
존슨은 돌격으로 위기를 돌파해온 코뿔소의 생존 비결이 인간사에도 다양하게 적용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어려움에 빠진 기업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기업이 어떤 비전을 세웠다면 이런저런 위기에 굴하지 말고 돌격하라고 주문한다.
경영의 관점에서 코뿔소 이론을 풀어 보면 ’선택과 집중’의 논리가 된다.
시장의 지평이 세계로 확장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거대 기업이라도 모든 분야에서 1등을 차지할 수 없다.
그보다는 개별 기업의 비전과 강점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최대한 털어내는 선택이 필요한 시대다.
생존이라는 목표를 일단 정하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올 들어 한국 기업들 간에 새로운 담론으로 자리 잡은 ’샌드위치 코리아’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저비용을 내세워 ’세계의 공장’으로 커온 중국은 최근 기술력으로 무장하면서 한국의 주력산업을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봤던 조선이나 자동차.정보기술(IT) 분야도 어느새 쫓기고 있다.
10년 불황에서 벗어난 일본은 탄탄한 기술력과 자금력을 토대로 한국 기업에 내줬던 실지 회복에 나서고 있다.
투자 의욕을 잃은 한국 기업들이 앞으로 10년, 20년을 먹고살 새로운 주력산업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현상이다.
맹수처럼 둘러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면 코뿔소 이론을 권하고 싶다.
차제에 기업들은 다시 한번 비전과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전력을 다해 돌격하기를 바란다.
어차피 내줄 사업, 가망 없는 제품은 과감히 버리자.
남은 자원과 집념을 돌격의 에너지로 쏟아붓도록 하자.
기업인 역시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 딴생각 버리고 집중하자는 것이다.
존슨은 성경의 모세,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카이사르 등을 역사에 남은 코뿔소들로 꼽았다.
이들 모두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성공 사례로 꼽히는 한국의 경제사에서도 수많은 코뿔소를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국력을 건 승부였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80년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반도체 투자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만약 경부고속도로나 삼성의 반도체가 없었다면, 혹은 중도에 포기했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이 순간에도 기업을 살리기 위해 온몸을 던져 돌진하는 코뿔소들이야말로 샌드위치 코리아를 건져낼 희망이다.
코뿔소를 다시 보자.
<중앙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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