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ㅡ낙엽이 나무에게
허영숙
책 한 권의 내력을 가졌을 법한 오래된 나무들이 오후를 졸고 있네요
바닥에는 한 계절 이름값 하느라 흩어져 흔들리던 잎들이
족보도 촌수도 없이 서로 얽히고설킨 후에야 결속을 지녔습니다
푸를 때는 바람도 밀어내시더니
지금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쓸고 가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아슬아슬한 조바심에 서로의 근황을 묻고 있는데요.
스침과 쓸림 사이에 계절을 이렇게 허물어 버리시다니
사무치게 쓸쓸해지는 것은 바람 뿐만은 아닙니다
햇살의 마음이 옮아와
바닥에 내려와서야 온도를 지녔습니다.
누가 덮고 자더라도 서리쯤은 거뜬하게 막아주겠다는 마음을 읽은 청설모 한 마리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지나갑니다
아무도 살피지 않는 계절, 살기 위해 버린 잎들은 다 잊어버리고
날아갈 듯 날아가지 못하고 날개만 퍼덕이고 있는
이파리 몇 장 겨우 붙들고
나무는 또
어찌 지내시는지요
―웹진『시인광장』(2018년 12월호)
출처 : 블로그 ‘하루 시 한 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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