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잠을 점선대로 오려 붙이면 ​/김현서

뚜르(Tours) 2024. 2. 3. 14:46

 

 

잠을 점선대로 오려 붙이면  ​/김현서



잠을 점선대로 오려 붙이면 멋진 마술사 모자가 된다

마술사 모자를 쓰고
초저녁부터 꿈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고
밤새 식어 빠진 커피를 홀짝거리며
꿈을 깨려는 사람이 있지만

가위질이 서툰 나는
노신사도 기관사도 도어맨도 어울리지 않는
지하 묘지 같은 모자를 만들지만

나는 세상이 잠드는 걸 보기 위해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잠자는 새를 조심하고
잠자는 바퀴벌레를 건드리지 않지만

나는 마술사를 사칭한 사기꾼에게 당한 적이 있고
나는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는 점선이고

더러 눈이 흐릿한 창문에게 화를 내면서
마술사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내 귀마개를 씌워주지만

잠을 점선대로 오려 붙이면 연속무늬 모빌이 된다

빨간색 한 장 초록색 두 장
가식적인 중심선을 접었다 편 후
각을 맞춰 보지만

여러 번 겹쳐서 접은 종이에 그려 놓은
흑백 눈알과 허공을 어떻게 오릴까

환멸을 퍼 나르는
잠은 절대 공복에 오지 않으니까
마음이 허한 나는 좀처럼 잠들 일은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쪽잠에 익숙한
도시의 긴 잠이 속임수 같고
머리맡에 매달린 모빌은 계속해서 떨그렁대고

잠을 점선대로 오려 붙이면 출구가 없는 동굴이 된다



ㅡ게간 《포지션》(2023,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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