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부근 / 조연호
그 立春 부근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나는 제방에 걸터앉아 못생긴 꽃의 꽃말을 외웠다.
아무도 떠나지 않은 자리에 마음이 머물던 자국만 남아 있다.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마음 좋은 청춘은 만날 수 없던 날, 들풀이 머리칼처럼 야윈다.
늙은 개암나무 곁에서 허리를 굽혀 봄볕의 마음을 줍는다.
내가 꽃말을 외울 때마다 거짓으로 잎순이 부풀어 올랐다.
가난한 애인과 함께 부자의 마을에서 헤픈 상대방이 되고 싶던, 내 그리움이 가시에 찔려도 터지지 않았다.
따사로운 나무둥치들이 어린 양처럼 매매 울며 어미 숲을 부른다.
쑥냄새가 나는 길을 걸었고 그 길가에 호들갑스레 꽃 피고 여동생의 책가방에서 화장품이 쏟아졌다.
찌처럼 조용히 그늘 위로 머리만 내민 봄볕은 자기를 물고 어둠 밑으로 순식간에 내려갈 바람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 조연호,『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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