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대 /한이로
방 안에서 우리는
창밖으로 보이는 풀밭 위에 앉았다
누런 풀들이 새파란 듯
일 년 만이네요
듬쑥 손을 잡는데
그녀의 황톳빛 손가락이 부스러지고
나의 손바닥엔 오래된 풀물이 들었다
티브이에서 꽃이 피고
벽지에는 나비가 날았다
찻물을 안치려는 그녀의 바짓단에서 슬쩍 따낸
고드름에서
눈물 냄새가 났다
내가 몰래 먹물 탄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말했다
이제 또 한 해가 저무는구나
그녀의 주름이 그녀의 시간처럼 촘촘했다
내가 다시 일어나 불 위에 물을 얹었다
국수 좀 드시겠어요?
비닐봉지에서 살며시 고무줄 한 줌을 꺼내며
고개 돌려 물었다
국물이 식어 가는 동안
벽면에 고여 있던 바람이 자꾸만 흘러내려
눈보라처럼
꽃잎이 방 안 가득 흩날렸다
우리는 일어나 문 앞에 마주 섰다
그녀의 좁은 어깨가 거의 다 허물어져 있었다
그녀를 조심스레 안았고, 나를 힘껏 힘없이 안았다
12월이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엄마
내 한쪽 뺨이
하얗게 차가웠다
ㅡ웹진 《님Nim》(2024,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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