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K-팝 가수들이 세계를 휘젓고, 외국 가수들도 잇따라 내한 공연을 갖고 있지만, 1980년대만 해도 외국의 슈퍼 스타들은 이웃 일본엔 가도, 한국은 오지 않았습니다.
‘내한 공연’의 첫 물꼬를 텄지만, 기성세대의 반감 때문에 오히려 장벽을 높인 결과를 낳은 가수가 1940년 오늘(10월 14일)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인도의 북부 러크나오에서 태어난 클리프 리처드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Congratulations’, ‘The Young Ones’, ‘Evergreen Tree’ 등의 히트곡으로 유명한 클리프는 영국에서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에 버금가는 앨범 판매량을 자랑하는 ‘국민 가수’랍니다. 55세 때 기사 작위를 받았고 84세 나이에도 기타와 마이크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1969년 그의 첫 내한 공연은 한국에 ‘문화 쇼크’를 안겨줬습니다. 언론은 10대 팬들이 브래지어와 팬티를 던지며 광란을 연출했고 괴성을 지르다 기절하는 여성 팬도 속출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클리프가 여대생이 던진 속옷으로 코를 풀었다는 기사도 나갔습니다. 한반도는 충격에 휩싸였고, 4년 뒤 클리프가 다시 내한 공연을 타진하자, 정부는 ‘장발’을 표면적 이유로 입국을 불허했습니다.
그러나 2003년 클리프의 두 번째 내한 공연 때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졌습니다. 클리프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속옷 사건’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하고 “팬들이 하나같이 노래를 너무 잘 따라 불렀던 것은 또렷이 기억나지만 속옷은··· 그게 뭐지요?”라고 답했습니다. 이와 함께 그때 매도 당했던 팬들과 현장의 진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클리프 리처드 내한 공연의 일등공신은 여고생들 팬 클럽 CRC(Cliff Richard Club)였습니다. CRC는 영화 ‘더 영 원스’를 보고 클리프의 매력에 빠진 여고생 7명이 청계천의 레코드점에 모여 결성한 팬클럽으로 경기, 이화, 숙명, 진명, 정신여고 등으로 열기가 번져 회원이 한때 2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해외에서 클리프의 음반을 사서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직접 전달, 방송을 타도록 했습니다. 1969년 일본 공연이 확정되자 방송국과 기획사를 상대로 내한 공연 유치를 설득, 마침내 당시 민영방송이었던 MBC의 초청으로 서울 시민회관과 이화여대 강당에서 공연이 이뤄졌지요. CRC 회원들은 기성세대의 반발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클리프를 맞았습니다. 김포공항에서 한복을 입고 기다리다 꽃다발, 사진, 29번째 생일선물 등을 전했고 공연 때 일부 팬은 꽃과 손수건, 선물 보자기를 던졌습니다.
기성세대는 클리프 소식이 들리자마자 벽을 쳤습니다. 서울 시내 많은 여학교들이 그의 공연 일자에 맞춰 중간고사를 치렀고, 일부 학교는 학생들의 조기 하교를 막았습니다. 지도교사를 보내서 여학생들의 공연장 입장을 막으려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우려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자, ‘가상의 우려’는 언론을 통해 가공돼 ‘충격과 공포’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여고생들이 광란의 주범이었는데, 지금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기성 세대와 언론이 오히려 주범 같다는 것은 저만의 옥생각일까요?
이런 비이성적 ‘도덕주의자’가 아직도 수많은 학교를 지배하고 있지요? 자신만이 옳고 이성적이라고 믿는 분들이 ‘질서’ 밖 모든 담론을 배척하고 기본적 성교육은 물론 학생들의 문학, 예술, 스포츠 활동도 막고 있지요.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도 이들에 의해 금서로 지정됐고요.
오늘은 클리프 리처드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에 사로잡혀 사실을 왜곡하거나 남을 매도하는 것을 서슴지 않을까요. 특히 집단의식에 빠지면 최고 엘리트 그룹조차도 자신은 100% 옳고, 반대편은 미숙하거나 틀렸다고 단정할까요. 우리 인류는 과연 이성적 존재일까요? 누구나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자기 목소리를 줄이고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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