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눈사람 /황정숙

뚜르(Tours) 2025. 1. 20. 22:41

 

 

눈사람  /황정숙

 

​​

눈사람은 슬픈가

발자국을 눈사람은 만들지 못해서

사람의 발이 닿는 곳이 허공이라서 더 슬픈가

동식물에 이름을 붙이는 그 눈사람을 노래하다

진력이 난 발에는 어딘가 반항심 같은 순간이 들어있다

눈사람은 바짓단에 정말로 숨겨 논 신발이 있다면

눈사람의 신발이 사라졌다면

눈사람은 하루 종일 서 있을 수 있는가

아침이 오면 눈사람이 밤새 걸었던 발자국을 지웠다

발자국이 없다면 눈사람 같은 눈사람이 아니어서

혹은 전혀 눈사람이 아니어서 슬픈가

눈을 뚫고 온 바람을 하얗게 뭉치는 세상

어떤 눈사람은 잠자는 먹이를 잡고

어떤 눈사람은 잠자는 먹이는 잡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눈사람은 발을 잃은 짐승일까

그러나 눈이 녹으면 형체를 잃은 신이 아닌가

러시아 어느 소수민족은

호랑이의 발자국을 눈사람의 발자국으로 믿는다

그래서 슬픈가

나는 날씨의 냄새를 맡으며 눈사람처럼

저 얼어붙은 바람을 굴려도 왜 팔이 생겨나지 않는 거지

세상 어느 골목이나 골목을 돌아

우두커니 서 있는 눈사람들은 온기가 없다

눈이 사냥꾼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내려

사람들의 발을 하얗게 덮을 테지만

그래서 눈사람은 슬픈가

―계간 《포엠피플》(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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