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수선화 / 정호승

뚜르(Tours) 2025. 6. 14. 23:42

 

 

수선화  / 정호승

꽃 중에서도 죄 없는 꽃이 수선화로 피어난다

꽃 중에서도 용서하는 꽃이 수선화로 피어난다

꽃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꽃이

서귀포 검은 돌담 밑에 수선화로 피어난다

이른 봄에 수선화를 만나러 가면 추사 선생을 꼭 만난다

이듬 해 이른 봄에도

추사 선생을 만나러 가면 수선화를 꼭 만난다

사람 중에서도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수선화로 피어나

온 나라를 수선화 향기로 가득 채운다

겨우내 세한의 소나무에 앉아 있던 작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 사이로 푸드덕 흰 눈을 털며

우리는 오래도록 잊지 말자고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자고

봄이 오지 않아도 수선화는 피어난다고

수선화가 피어나기 때문에 봄이 온다고

추사 선생처럼 수선화를 바라보며

바다로 가는 봄길을 걷는다

월간 『유심』 2013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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