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上의 魂

남원 광한루원의 비석들- 조병문(趙秉文)

뚜르(Tours) 2008. 5. 15. 14:49

▶ 석조물 30 비석군(碑石群)

춘향사당 옆 담장밑에는 30기의 비석이 두줄로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은 이곳과 인연을 맺은 부사, 관찰사.
어사들의 선정비, 선덕비 등이다.

이 비석이 에전에는 동헌이나 부내 여러곳에 있다가 광복후에 이들 비석의 보존과 미화책으로 광한루원에 모아 관리하게 되었다.
비석군 역시 한 장소에 이처럼 많이 있는 곳도 찾아보기 드물다.
그중에는 광해군때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후에 청백리로 녹선된 민여임 부사의 비가 있으며, 정조와 순조임금때 두번에 걸쳐 관찰사를 지낸 이서구
관찰사 비도 있다. 이서구 관찰사는 호남고을 지명을 모두 넣어 호남가를 지었다고 전한데 가사내용은 관리들이 갖추어야할 내용을 담은 정겨운 곡으로 무려 200년이 넘게 불려지는 단가이다.
그 밖에도 수많은 일화가 있으며 지금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비석과 호석을 찾곤 한다.

 

 석조물 30 비석군(碑石群) =
(순서는 앞줄부터 좌측에서 우측으로 )

 

삼청이정사적비
남원부사 이식이 삼청(진상청, 보민청, 연호청)의 문란함을 바로잡은 공적을 새긴 사적비로 영조 24년인 1748년에 세웠다. 대리석 비신에 귀부와 이수로 되어 있는데 귀부와 이수조각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앞면 상단에 비명, 그 아래에 비문이, 우측에 숭정 기원 후 재
무진 12월 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부사 이상억 사적비
화강암 비석으로 철종 13년인 1862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석의 앞명에는 부사 이후상억사적비, 우측에 확반만포구?군정, 좌측에 인족불요 막백무세 읍양개관, 뒷면에 숭정후 4 임술 맹하 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남원지에 의하면 1855년(철종 6년)남원부사로 재임하면서
광한루를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이용준 불망비
화강암으로된 월두비로 1938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아후이공용준 영세불망비, 뒷면에 숭정기원후 5 무인 9월 일 세욺이라 새겨져 있다. 1879년(고종 16년) 광한루가 북쪽
으로 기울어지자 추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월랑을 건립한 부사이다.

관찰사 이석구 불망비
1882년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 이공서구영세불망, 뒷면에 숭정후
4임오 중동 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이서구(1754~ 1825)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낙서, 호는 척재다. 정조 17년(1793년과 순조 20년(1820년) 두차례 전라 관찰사를 지냈으며 수지면
견두산을 제압하도록 호석을 세워 남원 부중에 재앙을 막았다. 이설에는 단가 호남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부사 조위수 유혜거사비
비석의 앞면에 부사 조령공위수유혜거사비라 새겨져 있고, 우측에 8자, 좌측에 4자가 있으나 거의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다. 뒷면에는 새이거 갑자건비 중년 북절 무진 12월 중건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석이다. 조위수는 1680년 8월 1683년 7월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이 비는 1684년에 새웠는데 비가 넘어져 168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부사 조위수는 정유재란때 없어졌다는 과목전 지금의 용성초등학교에 있었던 용성관에 있던
남원부의 과일밭을 다시 복원한 인물이다.

부사 김영근 불망비
비석의 앞면에는 부사 김후영 근영세불망이라고 새겨져 있고,뒷면은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다. 아랫부분에 계묘 8월이란 것만 남아 있는데 1848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비석은
농대석과 가참석을 갖추고 있는데 농대석은 네모꼴이고 가첨석은 망두형으로 되어 있다.
헌종 5년(1839년)남원부사를 지냈다.

부사 민여임 선정비
비석의 앞면에는 부사 민영공여임청덕선정비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마멸되어 11월만 알아 볼 수 있다. 네모꼴의 농대석(좌대)과 꽃잎무늬의 둘레에 둥근 모양의가첨석을 갖추고 있다. 민여임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성지, 호는 취웅, 본관은
여흥이다. 1591년에 진사가 되고 1597년 정유재란때 명나라 장수의 접반관이 되고, 1614년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부사 송수연 불망비
비석의 앞명에는 부사 송후수연영세불망이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축 9월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사각의 농대석과 망두형의 가첨석을 갖추고 있다.

부사 박정 선정비

부사 박종대 선정비

부사 이병석 불망비

부사 홍집규 선정비

부사 조병문 선정비

부사 안응수 선정비

부사 홍병희 불망비

부사 정엄 선정비

부사 남진화 불망비

부사 조명교 선정비

부사 조진의 불망비

현감 남주헌 선정비

관찰사 민??선정비

관찰사 이헌직 불망비

어사 이면상 불망비

부사 김윤현 불망비

좌영장 배상규 선정비

어사 심동신 불망비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

부사 송상인 청백비

북시장 개창비
이 비석은 남원 북시장을 개창한 내용을 기록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퇴락하여 없어지자 다시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남원 북시장은 현재 남원의료원이 있는 자리로 1900년 이태정 군수가 열었다고 한다. 군수 이태정은 고종 36년에 남원군수로 부임하여 1년간 재임하였다.

관찰사 이돈상 불망비

부사 성안의 비
이비석은 광해군 3년(1611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광한루원 동쪽 연못가 약 30미터
지점에 있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의 아버지 비석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비석의 전면에는 부사 성공 안의 선??라 새겨져 있는데 선자 아래는 확인할 수 없다.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배경인 숙종 임금 즉위(1675년)시대 보다 약 60여년전에 남원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춘향의 아버지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광해군 초기때 성부사의 딸로 태어나 이 도령과 인연을 맺어 60여세의 수를 누린 후 세상을 떠나고 숙종조를 배경
으로 소설로 등장하였다는 가정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춘향전의 여러 근원설화가운데
광해군때 태어난 성안의 아들 성이성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부사 생일 잔치에 참석하여
금준미주천일혈~' 하는 시를 짓고 암행어사 출두를 하였다는 성이성 설화가 있는데 이
설화의 주인공 성이성이 성안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기타
이밖에도 춘향사당 남쪽 20미터 지점에도 양남식 기적비와 그 뒤로 면장 양재영 시혜비,
그리고 이승면 대통령이 썼다는 충혼불멸비(대한청년단 남원 군단에서 1954년 세움), 충혼비(빨치산토벌작전에 희생된 전투경찰의 충혼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고, 북문 우측에는
최근에 세워진 광한루 연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