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강(滄江公 諱 趙涑)

<우암 작품 단 1점 내건 '송시열특별전'>

뚜르(Tours) 2008. 8. 21. 16:39

"간송학파 핵심은 진경보다는 우암과 노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2007년 봄 정기전으로 '우암송시열탄신400주년기념서화전'(13-27일)을 마련했다.

그런데 우암 기념전을 표방한 전시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우암 작품은 총 출품작 100점 중 단 1점에 그친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사임당(師任堂) 신씨가 그린 어하도(魚鰕圖)라는 그림에 우암이 부친 글씨인 발(跋)이 그것이다.

간송미술관은 그 대신 우암을 빛내기 위해 창강(滄江) 조속(趙涑.1595-1668)을 필두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에 이르기까지 17-18세기 조선의 그림과 글씨를 대거 '찬조출연자'로 내놓았다.

70-80년대 이후 한국지식인 사회, 특히 조선시대 사상사와 미술사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일정한 학문적 견해를 공유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간송학파'라는 이름이 공공연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간송(澗松)이란 문화재 수집가로 간송미술관 설립자인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호(號).

명칭만으로 보면 간송학파란 간송을 학문적 스승으로 사숙한 학파인 듯하나, 간송은 직업적 학문종사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간송학파란 대체로 간송미술관을 무대로 활동했거나 하고 있는 일군의 연구자 집단을 지칭한다는 정도로 통용된다.

간송학파라는 이름 자체가 엄격한 학문적 정의를 동반하지 않은 사회통념에 의한 범칭이긴 하지만, 대체로 학계에서는 이러한 이름으로 일군의 직업적 연구자 집단을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흔히 일반이나 학계를 막론하고 간송학파라고 하면 트레이드마크 내지 마스코트격으로 '진경(산수화)'과 겸재를 공통분모처럼 거론하곤 한다.

실제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실장을 필두로 간송학파로 분류되는 연구자는 거의가 예외없이 진경산수화를 한국사의 중대한 분기점으로 거론하는 한편 겸재를 그 완성자로 추앙한다.

하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자리에서 간송학파를 바라보는 다른 학계 인사들은 간송학파를 하나로 묶어내는 핵심코드는 진경산수화나 겸재라기 보다는 '우암 송시열'이라고 지목한다.

간송미술관이 마련한 이번 '우암탄신400주년서화전'은 간송학파에서 우암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시품 100점 중 우암 작품은 단 1점에 지나지 않음에도, 이번 전시작 99점은 모두 우암 하나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간송학파에서 우암이 차지하는 위상은 "중국의 성리학을 독창적인 조선의 성리학으로 소화해 낸 율곡학파의 3대 수장인 우암의 사상은 중국 그림을 베끼지 않고 조선의 산수를 독자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의 뿌리를 이뤘다"고 하는 최완수 실장의 언급이 웅변한다.

국민대 국사학과 지두환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 한신대 국사학과 유봉학 교수 등과 함께 조선시대 사상자 전공자로서 대표적인 간송학파로 분류된다. 최 실장을 포함해 이들 모두 서울대 사학과(국사학과) 출신이라는 경력도 예사롭지 않다.

지 교수는 이번 전시도록에 기고한 '우암 송시열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글에서 우암을 지칭해 "조선후기를 망해가게 만드는 가장 보수적인 사상가에서 조선후기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가장 개혁적인 사상가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 교수는 나아가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의하여, 조선후기는 공리공담인 주자학을 고수하여 민생은 돌보지 않고 당쟁이나 하다가 일제에게 망한 나라로 인식되도록 연구되었고, 이의 주역이 우암 송시열로 연구"된 것을 우암을 폄훼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간송학파는 조선문화의 꽃으로 진경산수를 거론하면서, 이런 거대한 물결이 가능케 한 원류로 우암을 거론한다. 우암과 진경산수, 나아가 겸재가 무슨 상관관계인가에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하지만, 이런 반문에 간송학파는 이렇게 답한다.

"조선 진경산수화는 사대부 화가인 창강 조숙에게서 서막이 열렸다. 우암은 창강보다 12살 어리다. 창강이 그림에서 진경산수를 개척하는 중에 우암은 사계 김장생과 청음 김상현의 뒤를 이어 율곡학파 3대 수장이 되어 보수세력과 대결하면서 명분론을 내세우며 조선성리학 이념을 이데올로기로 올려 놓는다. 우암이 사약을 받을 때 14살이었던 겸재는 우암이 반석 위에 올려놓은 조선성리학 이념을 진경산수화로 완성한다."

간송학파는 저명한 서예가 한석봉도 진경산수의 개척자로 본다. 결국 사상사의 율곡이건 미술분야의 겸재건 이들이 모두 조선적인 독특한 사상(조선성리학)과 미술(진경산수화)을 개척했다고 보며, 그 복판에 우암이 있다고 간주하는 셈이다.

물론 간송학파의 이런 도식을 거부하는 연구자도 많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서는 진경산수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곤란하다는 비판론까지 대두될 정도다.

간송학파가 우암을 중시하는 다른 이유는 없을까?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뜻밖에도 "남인에 대한 간송학파의 반발" 심리를 지목했다.
이 연구자에 의하면, 간송학파가 중시하는 율곡과 우암은 노론(서인) 계열이다. 노론을 앞세운 간송학파는 남인 계열을 중시하는 다른 연구자 집단, 예컨대 퇴계 이황에서 정신적 뿌리를 찾고 성호 이익, 동사 안정복을 '정통'으로 삼는 벽사 이우성 박사 계열의 소위 '실학파'를 겨냥한다는 것이다.

간송학파가 "20세기에 부활한 노론"이라는 이 연구자의 지적은 과연 얼마나 타당할까?
이런 점에서 성리학의 폐해를 공격하며 일세를 풍미한 소위 '실학파'가 득세하던 80년대에 실로 공교롭게도 그런 실학파를 공격하면서, 성리학이 조선후기에 끼진 긍정적인 영향들을 강조한 글을 쏟아낸 연구자 중 상당수가 간송학파에 속한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