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서론

뚜르(Tours) 2008. 10. 18. 11:41

서  론


 나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단순하고 기초적인 수준으로 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가톨릭 교회의 내적 생활의 원칙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관상’이나 ‘마음 기도’와 같은 주제들은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동시에 가장 신비로운 하느님의 힘과 빛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며, 우리를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인류의 선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서 그분의 도구로 일하게 하는 은총을 다룬다.


 그러므로 이 책은 행동하는 삶에 적합한 몇 가지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하는 삶(active life)’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행동하는 삶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돌보는 등 활동을 주로 하는 수도자들의 삶이 뜻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관상 생활’과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행동하는 삶’이라고 할 때에는 대체로 이런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관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애덕의 표현이자 세례를 통해 맺은 하느님과의 일치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고찰되고 있다.


 행동하는 삶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성사를 집전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자선을 펼치는 것일 수도,

사회의 영적 쇄신을 위한 전 세계적인 노력에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봉쇄 수도원에 은둔해 있는 ‘관상가’라 할지라도 사회의 위기와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가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그는 사회의 혜택을 분배받고 사회에 대한 의무를 공유한다).

그 또한 기도와 거룩함 외에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교회의 일에 어느 정도 활발하게 참여해야만 한다.


 관상 수도원의 경우에도 생산적인 일은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이고,

넓게는 사회에 대한 봉사로 볼 수 있다.

관상가들이라도 국가의 경제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역할이 갖는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특히 수도원이 피정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쉴 곳과 성찰이라는 ‘봉사’ ─ 매우 중요한

봉사임에 틀림없는 ─ 를 제공할 경우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미 이 책이 관상가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동하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동하는 삶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가시적(可視的)인 교회의 권위에 일치하면서,

인류 사회 전체의 영적, 물질적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삶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교 활동에 적합한 특정 기법들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모든 타당한 그리스도교 활동이 솟아나와야만 하는 원천이 은총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잎이나 열매가 아니라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동하는 삶을 다루면서 힘, 의지, 활동 자체보다

은총과 내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가?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은총과 마음이야말로 초자연적인 활동의 진정한 행동 원리들이기 때문이다.

광기와 인간적 야망에서 기인한 활동은 망상이며 은총에 장애가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장애가 되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행동주의라는 거짓 영성과 성령의 인도를 받은

그리스도교적 행동의 진정한 활력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모든 행동이 영적 생활에 위험하다고 섣불리 판단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분리를 가져와서도 안 될 것이다.

영적 생활은 외부와 고립된 은둔의 삶도 아니고,

온실에서 재배되듯 인공적으로 꾸며진 고행을 실천하는,

그리하여 평범한 삶을 사는 일반인들은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생활도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의무와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과 영적인 일치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지침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 생활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나 설교자는 그들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십상이다.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노동,

생산적인 사회 분위기와 통합되는 노동은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권력과 부를 좇기 위해 피곤한 광기와 낭비로 얼룩진 세계적인 투쟁에 휩쓸린 노동은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 삶에 효과적인 공헌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 책에서 그 주제에 관해 몇 장을 할애하고 있으나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했다.

논쟁의 소지가 있는 분야나 명확치 못한 부분은 제외하였다.

나는 개개인의 일상적인 노동이야말로 영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노동이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에 도움이 되려면 노동을 정신적이요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하느님께 바쳐야 할뿐만 아리나,

그것을 이 세상의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려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노력에 통합시켜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노동은 올바르고 정직해야 한다.

그리고 생산적이어야 하며 인류 공동체에 긍정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문명을 세우려는 인류의 보편적인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다가오는 세상을 가장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함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노력(거룩함을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다)은

또한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교회의 활동과 맥을 같이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로 후퇴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거룩함은 동료 인간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올바르고 생산적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사명에 대한 책임이나

참여를 피해서는 안 되며 피할 수도 없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강력한 어조로 “현세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인간관계로 이끌고 있으며,

그 질서는 인간의 노력과 예상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초월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의 완성을 향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이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동참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의무를 깨닫는 데 있다.

 

만일 이 깨달음이 거룩한 은총에 의해 밝게 비춰지지 않는다면,

관대한 노력으로 강화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리나 인류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선익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 깨달음은 한낱 허상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