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성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쁨

뚜르(Tours) 2009. 6. 4. 14:13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쁨 나는 상담하러 온 사람들에게 지난날 즐거움을 느꼈던 일에 대해 질문했다가 어릴 적 나무 위로 올라가곤 했다던가 굴속으로 들어 가서 조용히 숨어 있는 것 같은 종류의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어떤 부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와 싸우고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나 잔뜩 언 짢은 얼굴로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곤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망쳐서는 목수였던 할아버지가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흔들의자는 커다란 백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으면 마치 그 집안의 가장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큰 존재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그 의자 위에서는 자신을 이전보다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더 강해지는 것 같고, 내면에서 힘이 솟아오 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 입에서는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아버지의 고함소리와 폭력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녀는 그 런 아버지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것을 잔뜩 언짢은 얼굴로 표현 했고, 그런 얼굴로 아버지와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오는 파괴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언짢은 얼굴로만 지 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계속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버지에게 너무나 큰 힘과 권위를 준 격이 되었을 것이다 백조모양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품위를 되 찾아 자신의 가치를 다시 만나고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 집안의 가장이나 된 듯이 느끼면서 타인이 도저히 침범할 수 없는 가치를 소유한 것처럼 상상하기도 했다. 그 흔들의자가 백조 모양이었던 것이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백조는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큰 새이다. 아름다움과 깨끗함의 상징인 백조는 고대의 미와 사랑의 여신이었던 비너스의 새였다. 인도에서는 창조의 신인 브라마(Brahma)가 백조를 타고 다닌다 고 여긴다. 백조라는 표상을 통해서 어린 그녀가 느끼는 사랑과 기쁨, 강함과 아름다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품위 같은 것은 소리치고 때리는 그녀의 아버지조차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소녀는 백조 위에 앉으면 노래가 흘러 나왔다. 노래를 부름으로써 소녀는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기쁨의 원천인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이런 기쁨은 소녀가 입은 상처와 고통에도 아랑 곳없이 없어지지 않고 내면의 저 깊은 곳에 들어 있다가 다시 솟아 오른 것이다. 그녀가 이런 삶의 기쁨, 그리고 생명력의 원천과 접 하고 있는 동안 상처와 고통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녀는 자기 자신, 이 세상,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건강하고 좋은 상태에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는 하나의 중요한 걸음이다. 이것은 또한 그녀의 영성적 자취이기도 하다. 나에게 이런 체험을 말했을 때, 그 부인은 일종의 영성적 위기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느님이 사라 져 버린 듯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영성적인 내용들이 모두 없어져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고 현실과 동떨어져서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고유한 영성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춤을 추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 자주 음악을 튼다고도 했다. 이것은 내면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충동일 뿐 영적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제 그녀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러면서 자신의 춤과 노래를 소녀 시절에 발견했던 영적 자취와 연결시킬 수 있다고 느꼈다. 이제 그 부인은 수도원에서 배운 영적 삶의 방법들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헛수고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 자신을 노래하고 춤추도록 부추기는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생명력을 따름으로써 스스로 영성 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과 평화롭게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내적 생명력이 기쁨으로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던 또 다른 장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그곳은 마을에 있던 작은 성당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여자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게 좋았다. 그녀는 인형에게 옷을 입히기도 했고, 유모차에 뉘어 두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성당 안의 의자에 올라서서 인형을 흔들어 대기도 했다. 성당지기는 그녀가 그렇게 노는 것을 금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런 놀이를 성당 안에서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당시 어린 소녀였던 그녀는 왜 자신이 성당 안에서, 그리고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즐겨놀았던가에 대해 별로 생각하 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그런 장소들을 특별한 의식 없이 자연스 럽게 발견해 내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 무엇이 자신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인자하신 모습과 어머니의 사랑을 드러 내 주시는 분이다. 그녀의 친어머니는 다소 차갑고 다정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따뜻함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이들에 대하여 화를 내고 어머니와 싸우는 일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알 수 없어 서 언제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성당 안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는 아이 들이 자신의 놀리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들 을 방해하지 않았다. 성당은 그들에게 하나의 은신처였다. 성당은 그들에게 신비로 가득 찬 공간이었고, 생명력으로 충만된 곳,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따뜻함과 아량이 넓은 어머니와 같은 곳이었고, 화를 내는 아버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종교교육을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바라보도록 배웠고,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배웠다. 이러한 종교교육은 그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를 거슬러 올바 른 하느님상을 형성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놀았던 것에 대한 회상은 그녀로 하여금 하느님을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여성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했다. 그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하느님이 그녀를 생명력과 기쁨으로 가득차게 한 것이다. 「다시 찾은 기쁨」에서 안셀름 그륀 지음 / 전헌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