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역사 시리즈(13-1)/배봉균(가톨릭 굿뉴스 자유게시판)

뚜르(Tours) 2009. 11. 2. 13:11

자마 전투사 개략  ‘오, 자마 !’

 

 

아프리카 전황 (B.C. 204~202)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릴리바이움에서 추정 병력 보병 1만 6천 명, 기병 1천 6백 기의 원정군을 이끌고 출항했다. 메리쿠리우스 곶 남쪽 부근에 상륙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마세실리아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했다.

 

 

 

포에니 전쟁 중의 북아프리카

■ 카르타고 동맹   ○ 제 3지대   X 로마가 승리한 전투   + 로마가 패배한 전투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누미디아까지 들어가 마세실리아의 왕 시팍스를 포로로 잡아들였고 마실리아의 왕 마시니사는 자신의 왕국을 되찾게 되었다.

 

  놀란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에게 평화협정을 요청했다. 평화와 전쟁억제를 바랐던 스키피오는 비교적 온건한 강화조건을 내세우며 카르타고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로마로 사절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한니발과 마고에게도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한니발은 이미 이탈리아 반도를 떠날 준비를 마쳤고 마고는 귀국 도중 병사했다. 조국을 떠나는 그 어떠한 망명객도 적지를 포기하는 한니발보다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니발이 떠나자 로마인들은 환호함과 동시에 또 다른 걱정에 휩싸였다. 적지에서 외롭게 싸우던 한니발은 이제 고향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한니발의 합류에 고무된 카르타고는 로마인들의 우려대로 조약을 파기하고 표류한 로마 수송선단을 나포했으며 로마 함선을 공격하기도 했다.

 

유인 및 회담

 

  조약이 파기된 줄 모르고 있던 카르타고의 사절단은 스키피오에게 억류되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비열한 행동에 대하여 로마의 관대함과 도량을 보여줌과 동시에 적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하여 공포에 떨고 있던 카르타고 사절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한편, 한니발은 하드루메툼에서 누미디아 족장 티케우스의 기병 2천을 받아들였고, 마고의 병력이었던 1만 2천 명의 리구리아군을 접수했다. 혹자는 필리포스 4세가 보낸 4천 명의 마케도니아군도 있었다고 한다. 스키피오는 적지에 고립된 꼴이 되었고, 한니발은 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승리의 여신은 한니발 쪽에 있었다고 리들 하트는 말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에게 가능한 빨리 합류하라는 급전을 띄움과 동시에 바그라다스 강을 따라 진군하며 만나는 모든 마을을 파괴했다. 이는 마시니사의 진군로를 줄여줌과 동시에 카르타고의 세력권을 유린함으로써 한니발이 카르타고로 가지 못하고 자신을 따라오도록 하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또 스키피오가 염두에 둔 전장은 기병력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로마 군이 싸우기에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다.

 

  한니발도 스키피오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여 자마에 도착했다. 이때, 로마 군을 염탐하도록 보낸 카르타고 척후병 세 명이 로마군에게 잡혔다. 스키피오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진지를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준 다음 다시 한니발에게 보내 주었다.

 

  이 대담한 젊은 적장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제의했다. 스키피오는 그 제의를 수락하며 자신이 회담 장소와 날짜를 통보하겠노라고 답했다. 그와 동시에 스키피오는 자신의 진지를 허물고 물이 가까운, 보다 유리한 장소로 진지를 옮겼다. 진지를 옮긴 그는 그제서야 회담 장소와 시일을 통보했다. 뒤늦게 진지를 옮긴 카르타고군은 물이 멀리 떨어져 있어 고생을 했다고 한다.

 

  두 명의 영웅은 진지에서 가까운 언덕에서 만났다. 먼저 한니발이 인간의 운명의 불확실성을 거론하며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전쟁을 일으킨 것도, 평화 조약을 파기한 것도 카르타고 측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평화 협상을 거절했다.

 

포진

 

 

 

  다음날 아침, 양군은 나라가라 평원에 포진했다. 스키피오는 중앙에 2개 군단 규모의 중무장 보병대를, 좌익에 라일리우스가 이끄는 이탈리아 출신의 기병대를, 우익에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했고, 누미디아 보병 6천 명은 군단의 오른쪽에 배치했다. 군단병은 통상적인 세 개의 전열을 형성했는데, 보통 지그재그로 배치되는 마니풀루스들을 1열로 배치해 대형의 중간 중간에 큰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스키피오는 전열의 맨앞에 있는 경무장 보병들에게 개전의 임무를 맡기고 적의 전투 코끼리隊에 전세가 밀리면 그대로 통로로 대피하거나 첫 마니풀루스의 뒤로 대피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한니발은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들을 맨앞에 배치했고, 그 뒤로 경무장 보병을 포함한 발레아레스, 리구리아, 갈리아 출신의 병사들로 1전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2전대로 카르타고와 아프리카 본토에서 징집한 병사들을 배치했다. 이 1전대와 2전대는 로마 군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한 병력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니발의 최정예 부대는 2전대로부터 약 200미터 후방에 배치되었고, 누미디아 기병대는 좌익을, 카르타고 기병대는 우익을 맡았다. 양군의 총병력은 로마 측이 3만 6천 명, 카르타고 측이 5만 5천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기병력은 로마군이 우세했다.

 

결전

 

  전투는 양측 누미디아 기병대의 교전으로 시작되었다. 교전이 일어나자 한니발은 즉시 전투 코끼리의 돌진을 명령했다. 그러자 로마의 경보병들은 코끼리 떼가 다가오길 기다려 나팔을 불었고, 깜짝 놀란 코끼리 떼의 일부는 카르타고군의 좌익으로 달려들었다. 이 와중에 카르타고의 양익은 각기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의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카르타고의 측면은 모두 비게 되었고, 로마의 기병대도 적 기병대를 추격하느라 잠시 전장에서 이탈했다.

 

  로마군에게 돌진하던 전투 코끼리들은 창세례를 받기보다는 로마군이 미리 만들어 놓은 통로로 빠져나가는 길을 택했다. 로마군은 스키피오가 적절한 조치를 해놓은 덕분에 코끼리 떼에 의한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다. 곧이어 양측의 보병대가 중앙에서 맞닥뜨렸다. 갈리아, 리구리아 출신의 1전대는 교전 초의 기세는 사나웠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2전대가 그 전열을 흩뜨리지 않기 위하여 후방으로 밀려오는 패주병의 통과를 허용치 않았기에 패주병들은 2전대를 피해 측후방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기와 전의가 1전대보다 나았다고는 하나 2전대 역시 로마 군이 횡으로 길게 늘어져 세 방면으로 둘러싸 공격하자 곧 무너져 버렸다.

 

 

 

  드디어, ‘전투력과 경험, 그리고 명성에 있어서 로마군의 진정한 적수’, 로마인들의 피로 얼룩져 온 한니발의 정예 보병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스키피오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명령을 내렸다. 적의 눈앞에서 병력배치를 새로이 했던 것이다. 스키피오는 프린키페스와 트리알리를 절반으로 나누어 하스타티의 양 옆에 배치시켜, 얇지만 상대적으로 길고 밀집된 대형을 만들었다. 이는 집중된 화력을 보다 넓은 범위에서 가하기 위함이었다.

 

  양군은 그 명성에 걸맞게 한치도 물러섬 없이 호각으로 싸웠다. 오래도록 밀고 당기는 접전이 계속 되었다. 하지만 승부는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가 돌아와 카르타고군의 후면을 들이쳤을 때 판가름났다. 카르타고군의 전열은 붕괴되었고,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약간의 기병들과 함께 싸움터에서 빠져나와 하드루메툼으로 도주했다.

  한니발이 패한 것이다.

 

전술전략론

 

  이날 전투로 카르타고군은 2만 명이 전사했고, 또 2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로마군은 2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승부가 이날 펼쳐진 양측 전술의 우열을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 그리고 스키피오 본인도 인정했 듯, 이날 한니발은 최고의 전술을 선보였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스키피오의 손을 들어주었다. 파비우스의 주장에 반대하며 적의 주공을 직접 상대하기 보다 적의 본토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여 적의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철수를 유도하자는 전략을 주장한 이래로 스키피오는 늘 적이 자신의 장단에 놀아나도록 만들었다.

 

  카르타고군 기병력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던 마시니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아군의 기병력을 증강시킴과 동시에 적의 기병력을 줄인 외교적 조치, 지원군의 진군로를 줄여주며 한니발을 내륙으로 끌어들인 전략기동, 적의 첩자를 풀어줌으로써 적에게 가하는 심리적 공격, 적의 회담제의를 이용한 진지이동 등은 그에게 커다란 전략적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한니발은 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종전

 

  한니발의 제의에 따라 카르타고 평의회는 로마에 강화를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 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스키피오가 제시한 관대하고 합리적인 조건은 한니발에 의해 실행되었다. 한니발 전쟁은 종식되고 16년 만의 평화가 찾아왔다.

 

  강화가 성립되자 스키피오는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 시민들의 환호는 너무나 열렬해서 그를 종신 딕타토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과 모든 공회당과 유피테르 신전에 그의 조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 유명한 ‘스키피오의 절제’는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제지케 했다.

 

  33세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제패한 자라는 뜻으로 ‘아프리카누스’라 불리게 된다.

 

 

 

 

Under the Double Eagle - John Philip So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