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육안으로 사물을 보듯이 심안으로 인생을 본다

뚜르(Tours) 2010. 2. 15. 11:25

혹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니던 학교에도 들러 보고 뛰놀던 골목길을 걸어 보신적이 있습니까?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고향은 예외 없이 <작다>고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교실이 이렇게 작았던가?
이렇게 손바닥만한 운동장에서 놀았단 말인가?
이런 느낌은 우리의 기억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일순 기이한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우리의 기억력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우리의 얼굴이 커지고, 그 결과 두 눈 사이의 거리가 넓어진 때문에 생긴 현상이지요. 눈과 눈 사이의 거리에 따라 똑 같은 사물일지라도 그 크기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양미간이 좁은 새의 눈으로 보면 크게 보이고, 양미간이 넓은 코끼리의 눈으로 보면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좁은 양미간으로 보았던 학교, 운동장, 골목길 등을 넓어진 어른의 양미간으로 측정하니까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서 옳다고 느껴지던 일들이 자라면서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를 무수히 경험합니다. 소년시절의 생각이 청년시절에 다르게 변하고 중년에 와서는 더 크게 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같은 이치로 볼 때 오늘 당연시 되는 일에 대해서도 내일은 다른 판단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눈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옛부터 이를 심안이라고 이름을 붙여왔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사물을 보듯이 심안으로는 인생을 봅니다.
육안으로 물체의 크기를 재듯이 심안으로 사리를 분별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세포가 분열하여 두 눈의 사이가 넓어지듯이
무수한 경험이 확장됨에 따라 심안의 양미간에도 변화는 오게 마련입니다.
이런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를 받아 들이면 세상 살기가 한결 편안해 집니다.
이런 변화를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아집과 독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 읽고 밑줄긋기>에서